이갑도 이발사

"손님이 좋아해야 기술이 좋은 거지"

이갑도 이발사의 가위 인생 50년

사진관에서 도망치다

선약도 없이 그저 손님인양 '협동 이용원'에 앉았더니 고무신을 신은 늙은 농부가 이발을 마치는중이다. 면도를 시작할 때쯤 솔솔한 단잠에서 막 깨어난 그는 "잠이 살살오네" 하곤 굳이 안 해도 될 핑계를 흘리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때껏 TV 리모컨만 만지작거리던 아주머니가 세면대로 안내한다. '샴푸'라는 것을 끝내고는 옆 의자로 모셔 머리 지압을 서두른 뒤 스킨과 로션을 듬뿍 묻혀 서방도 아닌 사내의 얼굴을 아무런 부끄럼도 없이 쓱쓱 훑고는 "다 되었습니다" 한다.

한적하다 못해 고요하리라 여겼던 이발소는 손님이 줄을 잇는다. 동네 어른과 꼬마, 인근 조선소 직원까지 머리 모양도 다 제각각이건만 이갑도 이발사는 바리깡이니 컷터니 하는 기구들은 손에 쥘 생각도 없이 가위와 면도칼만으로 모든 이발을 마친다. 내 순서를 너댓 번 양보하다 실은 이야기를 좀 나누고자 왔노라, 다른 기구는 안 쓰시냐 묻는 말에 "가위가 제일 빠르고 편하지"라는 예순 일곱의 이갑도 이발사. 육남매의 넷째로 태어나 가방끈 짧았던 그가 가위를 손에 쥔 것이 올해로 50년째다.

"그때가 17살이었지. 정월 보름에 밥도 안 주기에 냅다 도망친 뒤로 이발소로 와서 여태 이러고 있네."

너나없이 못 먹고 못 배우던 시절. 나무해서 통영에 내다 파는 게 돈벌이의 전부였으니 기술이라도 배우면 끼니 걱정은 없으리란 맘에 처음 고개를 돌렸던 데는 사진관이었다.

하지만 팔자가 아니었는지 그 일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삼각대에 플래시까지 온갖 장비를 들고 한밤 중 산길을 걸어 다니는 게 고생도 고생이었지만 사진사 인심이 그걸 훌쩍 넘을 정도로 야박했던 탓이다. 거제도까지 따라갔던 두 번재 결혼식 사진에 인화 정착액을 적시다 말고 안정 집으로 내뺀 게 가위를 들게 된 사연의 단초다. 어수선한 마음을 되잡지 못하고 방바닥에 벌렁 누워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는데 농협 이발관에 다니던 동네 어른이 마침 그의 집에 마실을 왔다가 제안 하나를 했다. 머리 감기는 일이라도 시작해서 이발 기술을 배우는 게 어떻겠냐는 것이다. 발이 부르트게 사진 일을 다니다 이발관을 지날 때면 '저렇게 한 군데에 앉아 일하면 얼마나 좋을까' 부러움이 간질간질 솟았던 터였다. 두 말 없이 따라 나섰다.


그믐날, 130명의 머리를 깎다

"손님 머리로 연습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발소 동기랑 둘이서 오늘은 오른쪽 내일은 왼쪽 하는 식으로 서로의 머리를 깎았지. 그 머리 꼴은 지금 생각해도 우습다니깐."

월급도 없이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며 기술을 배우다 거류면 이발소에서도 1년을 더 배우고 광도면 우동 농협 이발관에서도 1년을 더 거치고서야 면허를 갖게 되었다. 21살때다.

농협 이발소라는 게 한 달을 꼬박 일해도 3천 원 월급이 전부이던 그때이건만 설을 앞둔 섣달그믐이면 어찌 그리도 바빴던가. 전기도 연탄도 없던 그 시절, 철사를 구부려 초를 밝혔던 깊은 밤에도 온 동네 사람들이 줄을 서 있으면 배고픈 줄도 모른 채 머리만 쳐다봐야 했다.

"설날에 돈을 세어보니 1만3천 원이더라고. 하루에 130명 머리를 깎은 거지. 면도 거품에 손이 데인 것도 설날에야 알았지."

부산에서 면허 따던 날의 풍경도 여태 선명하다. 두피 질환의 종류와 원인을 대라는 등 필기시험 네 과목도 아찔했지만 실기에서 모델로 쓸 사람을 미처 구하지 못해 발만 동동 굴렀던 그 순간은 얼마나 캄캄했던가. 마침 시험장 앞에서 장사를 하던 아주머니가 그런 사정을 알아채고는 그 집 바깥사람을 붙여주어 얼마나 고마웠던가. 시험을 마치고는 면도라도 해주러 집을 찾아갔다가 사례비를 손에 쥐어줬던가, 아니던가.

  • 2, 3년이면 수명을 다하는 가위

    ▲ 2, 3년이면 수명을 다하는 가위

  • 아내 소효임 씨

    ▲ 아내 소효임 씨

  • 이용사 면허증과 요금표

    ▲ 이용사 면허증과 요금표


아, 지긋지긋한 보리밥이여

그렇게 문을 연 협동 이용원은 42년째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 거기서 가르친 제자 둘도 통영과 서울 강남에서 이발소를 하고 있다. 하지만 협동 이용원 풍경은 예전과는 많이 다르다.

집 앞이 흙길에서 포장도로로 바뀌고, 살림을 하던 방과 이발관 배치를 새로 하면서 의자도 거울도 중고품으로 교체한 탓이리라. '이발소 그림'도 한 장 없어 어딘지 섭섭할 때쯤 이갑도 이발사의 처 서효임(56)씨가 이곳에서 난 둘째 딸 이야기를 건네며 눈이 촉촉해진다.

"이 사람 이야기를 다 하자면 끝도 없지요. 시어머니 말로는 애를 낳는 날 아침에 초상한 손님이 들어 그랬는지 애를 낳고 보니 돼지 새끼 같기도 한 게 사람의 형상이 아니었다네요. 그래서 죽게 되면 죽겠지 하고는 이불에 돌돌말아 저 구석에 밀어놨는데, 그러고도 이틀을 더 살기에 그만 살리자 해서 키워보니 글쎄..."

그 딸은 말 못하고 듣지 못하는 장애인이다. 시집을 간 뒤에도 생활비를 보태줘야 할 만큼 살림이 어렵고, 그 딸이 낳은 두 손녀도 여섯 살이 넘도록 서효임씨가 맡아 키웠다. 병원에서 수술을 권할 정도의 허리 디스크와 장단지 통증을 앓는 이갑도씨가 가위를 놓지 못하는 데는 이런 애틋한 사연도 들었다. 그래도 지금은 나은 편이다. 7, 8년 전 안정에 성동 조선소와 가스안전공사가 들어서 손님이 크게 불었고 끼니 걱정은 않고 산다.

그는 1984년까지만 해도 밥에 보리를 섞어먹어야 했다. 마침내 쌀밥을 먹게 되었을 때의 기분을 "반찬이 없어도 넘어갔다"고 표현할 정도니 가난이 참 지긋지긋하게 길었던게다.

웰빙이다 뭐다해서 일부러 보리밥을 찾는 이가 많은 요즘이지만 이갑도 이발사는 아직도 보리밥만 보면 도리질을 친다.

"전 부인이 암 투병을 7년 했어. 논밭 팔아봐야 병원 빚 대기도 모자라고, 하루 1만5천 원 벌이 가위질로는 살 엄두가 안나더라고. 형님이 형수 모르게 1년에 쌀 너댓 가마 보내줘서 그걸로 살았지."


50년, 인정을 쌓다

배운 게 가위질 뿐이라 다른 길은 엄두도 안 내어봤다는 이갑도 이발사는 '사람 만드는 재미'가 있어 할만 했노라 지난 50년을 돌아본다. 설과 추석, 1년에 딱 두 번 이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시골인지라 머리 깎고 면도시켜 놓으면 새 사람을 만든 듯해 어딘가 뿌듯해진다는 것이다.

"출장 이발 다닐 때는 독거노인 일으켜 세워 면도까지 마치고 싹 씻기고 나면 얼굴이 참 좋아. 그러고 돌아가시면 할 일을 한 것 같아 마음이 놓여. 영정사진 찍는 사람도 같은 마음일걸."

선거날이라며 새벽 1시에 부르는 공무원, 관광 간다고 새벽 5시에 이발소로 찾아오는 아줌마, 술이 떡이 되어서는 면도 해 달라고 악을 쓰는 마을 사람, 기껏 불러 갔더니 헛걸음만 시킨 동네 어른 등 이발소 하면서 겪은 해프닝을 어디 손가락으로 셀까. 조선소 직원 4명 머리 깎을 시간에 마을 사람들은 3명 밖에 못 깎을 정도로 풀코스 서비스를 요구하는 게 시골 사람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거제 옥포서 차를 몰고 오는 수고를 마다 않고 협동 이용원을 찾는 단골손님, 협동 이용원에 들를 때면 아팠던 허리가 절로 펴진다.

"죽자니 아깝고 살자니 고생이라, 이 나이 먹도록 돌봐야 할 자식이 있는 탓도 있지만 내가 가위를 놓자니 손님들이 아쉬워할까 그게 마음이 걸리지."

안정에만 이발소가 4개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하나씩 사라지는 이발소를 보면서도 꿋꿋이 제 자리를 지킨 건 이발을 밥벌이로만 여기지 않은 마음에서다. 어떻게 깎는 게 좋은 기술이냐고 묻자 이갑도 이발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명쾌하게 답한다.

"손님 얼굴에 맞고 손님이 좋아해야지 지 혼자 잘 한다고 하면 누가 알아준담. 나도 대갈통이 못생겨서 딴 사람한테 맡기면 뽄이 안나. 그래서 내 머리도 내가 깎아."

가위 인생 50년, 그 반 세기의 시간에 기술만 아니라 인정도 쌓았던 것이다.

  • 베트남 호이안의 이발관

    ▲ 베트남 호이안의 이발관

  • 이발관 안의 모습

    ▲ 이발관 안의 모습

  • 이발 중인 모습

    ▲ 이발 중인 모습

베트남에 가면 이발소 한 번 들려볼 일이다. 여행의 자유에 취해 술 꽤나 마신 다음 날이면 더욱 좋겠다. 사우나에서나 있을 법한 접이용 가죽의자에 누워 비누 거품으로 면도를 마치고 나면 까무짭짜름한 아가씨의 손길이 머리를 주무른다.

당신은 촌스럽고 낡은 이발관에 걸린 HOT 시절 강타 머리를 구경하며 의자 위에 널빤지를 덧대고 앉았던 초등학교 이발관에 걸린 천사 액자나, 중학교 가느라 빡빡머리를 할 때 이유도 없이 찔끔거렸던 때를 떠올릴 지도 모른다.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태국말임에도 트랜지스터 라디오 특유의 주파음을 들으며 중학교나 고등학교 때 소중나갈 때면 챙겼던, 혹은 그 라디오에서 흘러 나왔던 옛 노래를 같이 흥얼거리던 친구들이 생각나기도 할 것이다.

나는 통영 중앙시장 한 귀퉁이에 있던 용남 이발관이 생각났었다. 명절 앞이면 반나절이나 기다리면서도 자꾸 내 순서를 빼앗겨 엄마가 찾으러 왔을 때에야 울음보를 터트렸던 그곳, 새로 들어온 머리감기는 아이가 내 친구여서 오히려 불편해 그 뒤론 가지 않았던 그곳, 그 용남 이발관이 아직도 있을까?

아무려나 당신의 추억은 굳이 깨어 있으려 애쓸 필요가 없는 단잠(아, 단잠을 '꿀맛'이라고 제일 처음 빗댄 이는 누구였을까?) 안에서 더 또렷해지거나 혹은 아련히 멀어지거나 할 것이며, 이 시골의 아가씨가 넉넉하게 당신이 하품을 하며 깰 때를 기다려 쏘곤쏘곤 귓밥을 파낼 것이다. 귓밥. 엄마, 누이 또는 연인... 누군가 내 귓밥을 파줄 때처럼 편안하고 다정할 때가 있던가.

나는 귓밥이라고 하면 이복형님이 생각난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추석이었던가? 뿔테 안경에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 입고 온, 아무래도 삼촌뻘인 사람을 나더러 형이라 소개힜을 때에도 그저 낯설기만 했었건만, 그 양복 바지 허벅지에 내 머리를 놓이고 내 귓밥을 파줄 때에야 속으로 '(갱상도 식으로다가)행님아~'라고 되뇌었던 것이다. 그 말쑥했던, 그래서 나보다는 좀더 도회적으로다가 잘 살 것이라는 짐작 때문에 선망하기조차 했었던 형님은 부러진 앞니를 새로 해 넣을 형편도 못될 만큼 한눈에도 가난한 일당 얼마짜리 목수로 내년 환갑을 기다리고 있지만, 그 늙수구레한 얼굴 안에는 여전히 귓밥을 파주던 행님이 진하게 남아 있다. 선친을 화장할 때 그 행님은 불속으로 들어가는 관을 어루만지며 "아부지이~"하고 아마 생전 처음으로 목놓아 부른 다음에 이렇게 말했었다.

"아부지라고 불렀심니데이~".

나는 그 때 행님의 허벅지 위에서 '행님아~'라고 속으로만 불렀던 일이 자꾸만 떠올랐다.

귓밥을 파고 나면 다시금 추억에서 깨라는 듯 이마를 부드럽게 때리는 안마가 이어진다.

그러고선 누구라도 알아먹을만한 시늉으로 거울 쪽을 가리키면 그제서야 이발, 면도, 아니 안마, 아니 귓밥 파기 서비스가 모두 마무리된다. 90년대 강타 머리가 싫다면 당신은 이발은 않겠노라고 미리 말하면 된다. 이발을 빼고도 이 서비스는 무려 1시간이나 이어지는 바, 그 요금은 우리 돈으로 2천원도 아니 된다. 단잠을 자고 추억을 건졌다면 거스름돈은 이발소에 두고 와도 얼마든 기꺼울 것이다. 이것이 패키지 여행에선 행사하지 못하는 자유여행의 만용이라고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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