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의 매력을 보고, 즐기다.
통영의 매력을 보고, 즐기다.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선조 31년(1598)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자 이를 애통하게 여긴 이 지방 사람들은 그의 충절과 위업을 기리기 위해 착량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초가를 짓고 정성껏 그를 모셔온 것이 이 사당의 시초가 되었다. 착량(鑿梁)이란 ‘파서 다리를 만들다.’라는 뜻으로 당포해전에서 참패한 왜군들이 쫓겨 달아나다 미륵도와 통영반도 사이 좁게 이어진 협곡에 이르러 돌을 파서 다리를 만들며 도망한데서 붙인 이름이다. 착량묘는 공의 사당 중 최초의 것으로 고종(高宗) 14년(1877) 공의 10세손 이규석 통제사가 초옥을 와가로 고쳐 짓고, 그 이름을 착량묘라 하였으며 이곳에서 지방민 자제들을 교육하였다. 현재 경역은 면적 899㎡에 사당, 서재, 동재, 고직사 등 4동의 건물과 내삼문, 외삼문으로 되어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집으...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선조 31년(1598)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자 이를 애통하게 여긴 이 지방 사람들은 그의 충절과 위업을 기리기 위해 착량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초가를 짓고 정성껏 그를 모셔온 것이 이 사당의 시초가 되었다.
착량(鑿梁)이란 ‘파서 다리를 만들다.’라는 뜻으로 당포해전에서 참패한 왜군들이 쫓겨 달아나다 미륵도와 통영반도 사이 좁게 이어진 협곡에 이르러 돌을 파서 다리를 만들며 도망한데서 붙인 이름이다. 착량묘는 공의 사당 중 최초의 것으로 고종(高宗) 14년(1877) 공의 10세손 이규석 통제사가 초옥을 와가로 고쳐 짓고, 그 이름을 착량묘라 하였으며 이곳에서 지방민 자제들을 교육하였다. 현재 경역은 면적 899㎡에 사당, 서재, 동재, 고직사 등 4동의 건물과 내삼문, 외삼문으로 되어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집으로 기둥머리에 포작(包作)을 두지 않은 건물이다. 서재는 2칸 마루와 1칸 방의 팔작지붕이며, 동재는 서원 양식을 갖추기 위해 일부러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건물들은 비바람으로 퇴락된 채 오랜 세월을 견디어 오다가 1974년부터 1985년까지 5차례에 걸친 정화사업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충렬사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으며 1974년 2월 16일 경상남도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었고 매년 음력 11월 19일 에 기신제를 봉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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