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소개
장석(裝錫) 또는 두석(豆錫)이 무엇인지 일반인들에게는 이런 어휘조차 생소할 것이다.
두석은 놋쇠 또는 황동이라 하는데 구리와 아연을 합금한 금속을 가리킨다.
이러한 구리계통의 합금을 재료로 하여 목가구에 부착하는 장식품을 만드는 장인이 장석장인데 전통시대에는 이를 두석장이라 하였다.
1604년 조선의 삼도수군 통제영이 이곳 두룡포로 옮겨간 이후 군수품 수급을 위해 전국 공인들을 불러들여 세운 12공방이 있었다.
12공방에서는 갓, 가구, 장식품 등의 공예품을 만들었다.
그 12공방 중 두석방에서 일하는 장인을 두석장이라 하는데 이들은 주로 장석과 자물쇠를 만드는 장인이었다.
통제영 12공방의 하나였던 두석공방에서 일했던 증조부 때부터 김덕룡의 집안은 장석을 만들었다.
김덕룡은 1916년에 태어나 3대째 가업을 이은 장석장이다.
그는 이미 그의 나이 여든 한 살 때인 1996년에 타계했고 다시 그의 아들 (김극천)이 뒤를 이어 2000년 7월 22일에 중요무형문화재 제64호 장석장 기능보유자로 지정받아 전수자로 계승하고 있다. 김
덕룡이 살았던 곳은 명정동의 ‘공덕귀여사 살았던 곳’맞은편이다.
고교 시절부터 부친을 도와 잔신부름을 하다 1975년 군 제대와 동시에 본격적으로 전수를 받아왔다는
김덕룡의 아들 김극천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 잔심부름을 하면서 어깨너머로 재주를 익혔다며
“배운 재주를 썩히지 말라”는 아버지의 권유를 뿌리칠 수 없어 외길을 걸어온 지 30여년이 되었지만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는 “천천히 야무지게 만들어라”는 아버지의 말이 아직도 귓전에 쟁쟁거린단다.
“나무쟁이(小木匠), 쇄쟁이(金屬匠)한테는 쑥 날 여가가 없다”라는 통영지방의 속담이 있듯이
김덕룡은 특히 엄한 시대를 만나 끼니 떼우기도 어려울 정도로 고생이 많았다.
가구를 꽃에 비유하면 장석과 자물쇠를 나비에 비유할 만큼 장석과 자물쇠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가구를 만드는 나무의 수종에 따라 금속의 재질이 결정되고 용도나 크기에 따라 형태가 달라진다.
기술과 예술의 결합인 장석
장석의 문양들은 한국 전통미의 휘황찬란한 세계를 보여준다. 복을 뜻하는 학, 다산(多産)을 가리는 물고기, 장수를 바라는 십장생, 군자의 덕을 표상하는 봉황 장석도 그러려니와 각종 자물쇠는 실용적인 생활용품이 됨과 동시에 미적인 유려함을 돋보여야 하는 것이고 경첩도 다양하기 그지없다. 장석은 거의 수작업으로 만들어지는데, 그 종류는 나비·태극·박쥐 등 2~3천여 종이나 된다. 크기가 작으면서 오밀조밀 예쁜 것이 특징이다. 특히 나비장석은 두석장 대대로 손꼽는 통영의 대표적 명물로 알려져 있다. 장인의 숨결이 배어있는 이들 장석들은 가구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지만, 전통가구의 기능과 조형미를 완성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장석 공예는 기술(craft)과 예술(art)의 만남이자 결합이다. 따라서 장석장은 기술자인 동시에 예술가이다. 장석의 기술은 금속 공예인이 계승해야 할 일이지만 장석의 예술은 특히 문학인들을 비롯한 미술가와 리듬 감각을 익혀야 하는 음악인이 되살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