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환 (柳致環, 1908년생)

경력
1908년(1세) 경남 통영 출생, 1959년에 발간한 자작시 해설집(구름에 그린다)에서 내가 태어난 곳은 "통영"이라고 밝혔다.
1918년(11세) 11세까지 외가 私塾에서 한문 공부를 하며 유년 시절을 보내다가 통영보통학교에 입학하다.
1922년(15세) 통영보통학교 4학년을 마치고 渡日, 부장[豊山] 중학교에 입학하다.
1923년(19세) 豊山중학교 4학년 때 한의원을 하던 부친이 다른 사업에 손을 대어 실패하자 귀국.
동래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하다.
1926년(20세) 동래고보 5년 졸업(제4회).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다.
이 무렵《참새》(통영 참새 모임회 간행) 제2권 제1호(4집)에 토막侍 「短歌」9편을 발표하다.
1928년(21세) 연희전문 문과 1학년 중퇴.
다시 일본으로 가서 사진학원에 다닌 일이 있다.
이 해 10월, 11세부터 알고 지내던 경성 중앙보육 출신인 같은 고향의 安東權氏 在順과 결혼하다.
이 무렵 일본 아나키스트 시인 다카무라 고오타로(高村光太郞), 쿠사노 심뻬이(草野心平) 등과 鄭芝溶의 詩에 감명을 받다.
1929년(22세) 귀국.
형 동랑을 중심으로 童心ㆍ推想兒ㆍ張春植과 함께《掃除夫》회람지를 발간.
長女 仁全 출생하다.
1930년(24세) 詩「靜寂」을《문예중앙》(제2호)에 발표.
차녀 春妃 출생하다.
1932년(25세) 평양으로 이주.
몇 달간 사진관을 경영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문을 받고 詩作에 전념하다.
3녀 紫燕 출생하다.
1934년(27세) 부산으로 이주.
이듬대(1935년) 화신 연쇄점에 1년간 근무하다.
1936년(29세) 일본 동경으로 떠나는 李箱이 부산시 초량동 집으로 찾아와 하룻밤을 같이 보내다.
1937년(30세) 통영으로 이주.
통영협성상업학교 교사가 되다.
이 무렵 시동인지《生理》를 崔上圭ㆍ張應斗ㆍ廉周用ㆍ朴永浦ㆍ柳致祥ㆍ催社春ㆍ金玘燮과 함께 부산 동구 초량에서 발행(제1집은 7월 1일, 제2집은 10월 1일), 이후 5집까지 간행되었다 하나 확실치 않음.
1939년(32세) 12월, 『靑馬詩?』를 金素澐의 소개로 알게 된 화가 具本雄의 부친이 경영한 靑色紙社에서 펴내다.
시「旗ㅅ발」외 53편 수록.
1940년(33세) 3월. 통영협성상업학교 교사 사임.
봄, 가족을 거느리고 만주 濱江省 延壽縣 維新區로 이주.
농장 관리인 및 정미소를 경영하다.
제2시집 『生命의 書』에 수록한 「首」, 「絶命地」, 「광야에 와서」등의 뛰어난 시가 이 때의 소산이다.
1945년(38세) 6월 말 귀국.
통영 문화유치원을 부인이 운영하다(1950년까지).
통영문화협회를 조직하다.
10월, 통영여자중학교 교사로 부임하다.
1946년(39세) 청년문학가협회 초대부회장.
이어 회장이 되다.
1947년(40세) 한국청년문학가협회 제1회 시인상을 수상하다.
5월, 시집 『生命의 書』(行文社 刊)를 펴내다.
詩「歸故」외 59편 수록.
문화단체총연합회 부산지부장이 되다.
1948년(41세) 3월, 통영여자중학교 교사 사임하다.
4월, 경남 안의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하다.
9월, 시집 『청령일기』(행문사 간)를 펴내다.
詩「동백꽃」외 34편 수록.
1949년(42세) 5월, 시집 『蜻玲日記』(행문사 간)를 펴내다.
詩「深山」외 65편 수록.
이 무렵 시동인지 《駱駝》를 주재.
1950년(43세) 6ㆍ25동란으로 부산으로 이사.
문인구국대를 조직, 육국 제3사단에 종군하다.
1950년에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수상하다.
1951년(44세) 9월, 시집 『老兵과 더불어』(문예사 간)를 펴내다.
詩「好天」외 33편 수록.
1953년(46세) 4월, 수상록『예루살렘이 닭』(산호장 간)을 펴내다.
경북대학교 문리대 강사를 지내다(1953~1954년).
1954년(47세) 4월,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피선되다.
<대구매일신문>에 칼럼을 쓰다(1957년까지).
10월, 시집『靑馬詩集』(문성사 간)(시집 『祈禱歌』와 『행복은 이렇게 오더니라』가 합본으로 나옴) 詩 「落花」외 총 1백 11편 수록.
1955년(48세) 경남 안의중학교 교장을 사임하다.
1월, 경주고등학교 교장에 취임하다(1955~1958년).
1956년(49세) 3월, 경상북도 제1회 문화상을 수상하다.
1957년(50세) 3월, 한국시인협회 회장에 피선되다.
4월,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재피선되다.
12월, 시집 『第9詩集』(한국출판사 간) 간행.
詩「春朝」외 38편 수록.
1958년(51세) 2월, 아시아 재단 자유문화상을 수상하다.
12월, 『柳致環 詩選』(正音社 刊)을 펴내다.
1959년(52세) 3월, 한국시인협회 회장에 재피선되다.
9월, 경주고등학교 교장 사임하다.
3월, 수상록 『東方의 느티』(신구문화사 간)를 펴내다.
12월, 자작시 해설『구름에 그린다』(신흥출판사 간) 펴내다.
1960년(53세) 예술원 회원 재피선되다.
12월, 시집『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동서문화사 간)를 펴내다.
詩「봄바람에 안긴 한반도」외 53편 수록.
1961년(54세) 3월, 경주여자중고등학교 교장에 취임하다(1961~1962년).
1962년(55년) 7월, 예술원상을 수상하다.
12월, 대구여자고등학교장으로 전임하다(1962~1964년).
1963년(56세) 한국 예술단체 총연합회 경북지부장이 되다.
수필집『나는 고독하지 않다』(평화당 간)를 펴내다.
7월, 경남여자고등학교 교장에 취임하다(1963년 7월~1965년 3월).
1964년(57세) 한국문인협회 부산지부장이 되다.
11월, 시집 『미루나무와 남풍』(평화사 간)을 펴내다.
詩「한그루 백양나무」외 41편 수록.
부산시 문화상을 수상하다.
1965년(58세) 4월, 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으로 전임되다.
한국예술단체 총연합회 부산지부장이 되다.
11월, 시선집『파도야 어쩌란 말이냐』(평화사 간) 펴내다.
1967년(60세) 2월 13일 하오 9시 30분 부산시 동구 좌천동 앞길에서 교통사로를 당함.
부산대학병원으로 가는 도중 사망하다.
장지는 부산시 사하구 하단동 승학산 기슭이었으나, 경남 양산시 백운공원묘지로 이장, 다시 1997년 4월 5일 경남 거제시 둔덕면 방하리 지전당골로 이장하다.

담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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