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영지는 말 그대로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자리로 1895년 삼도수군통제영 폐영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세병관만을 남긴 채 모든 관아 건물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세무서, 법원, 학교 등이 세워져 300여 년의 역사와 위용이 땅속에 고스란히 묻혀왔었다. 그러나 통제영지 일대는 우리나라 유일의 수군 군영으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아 그 터가 사적 제402호로 지정되었고, 일제시대 세웠던 건물들을 모두 다른 장소로 옮기며, 1999년 운주당 영역의 발굴조사를 시작으로 통제영지에 대한 발굴작업은 아직도 진행 중에 있으며, 발굴이 끝난 구역부터 순차적으로 복원공사가 실시되고 있다
2003년 복원된 운주당과 경충재(통제사 집무공간)
같은 시기 복원된 내아(통제사 관사)
현재는 2011년 3월 완공을 목표로 중영과 백화당, 12공방 등을 포함한 24개 동의 복원작업이 진행되고 있어 주요 관아 건물은 거의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며, 내년에 시작할 산성청, 좌청, 주전소 및 주변의 주차장 조성사업까지 완료가 되면 300여 년간 우리의 바다를 지키던 삼도수군통제영의 위용이 드러날 것이다.
지난 8월 한산대첩 축제와 시기를 맞추어 상량식을 했던 백화당은 단청작업이 한창이다.백화당은 통제사 휘하의 장수가 손님을 맞던 접견실이었으며 그 옆으로 통제영 12공방이 있었는데 각 건물들은 현재 한창 공사중이다.
공내헌(12공방을 관장하는 공방 관리자의 집무실)과 잉번청(각 방 색리들의 숙직실)
동개방(화살을 넣는 통개를 만들던 가죽공방)과 소목방(가구 및 문방구 등의 나무제품을 만들던 공방)
야장방(쇠를 녹여 철물을 주조하는 대장간) 및 통제영을 감싸는 담장과 영내 수로
통제영의 중심이었던 세병관은 일제강점기에 주변의 모든 건물들이 훼철될 때 소학교로 사용되면서 유일하게 과거의 모습을 보존한 건물이다. 수십년간 홀로 통제영지를 지키며, 조선수군의 위용을 침묵으로 웅변해왔던 세병관은 이제 본래의 담장이 복원되고, 주변 건물들이 하나둘 다시 세워지면서 원래의 위상에 걸맞는 건물이 되어가고 있다. 조선이 남긴 최대의 목조건물 중 하나인 세병관이 얼마나 큰 건물이었는지는 주변의 다른 건물들을 둘러보면 보다 더 확연히 드러난다.
중영의 화려한 단청, 삼도수군통제영의 직함은 임진왜란 중에는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였으나(이순신 장군이 임난 당시 전라좌수사였으므로) 통제영이 국가 정식편제가 되는 임난 이후는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가 되어 경상우수영을 따로 두지 않고 통제영내에 두었는데 그것이 중영이다. 중영은 통제사의 참모장이라 할 수 있는 우후의 지휘소이다.
12,000평이 넘는 대지에 세병관을 비롯해 100여 동의 관아건물을 거느렸던 삼도수군통제영을 모두 복원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겠지만 주요 관아를 포함한 현재의 30여동에 대한 복원만으로도 임란사 재정립 계기 및 통제영 역사 재조명을 통한 우리역사 바로 알기 차원에서 아주 의미 있는 작업이라 할 수 있겠다.
학생들의 현장학습공간으로 유용하게 활용되기를 바라는 복원사업 주체의 염원처럼 우리나라 최대군영이었던 삼도수군통제영이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탐방과 현장학습의 중심이 되기를 응원한다.
ㅇ 찾아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