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TV 개그프로그램에서 술 취한 사람이 신세한탄 비슷하게 내뱉곤 하던 이 말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한 때 유행어가 되기도 했었다. 1등은 항상 제한된 소수의 몫이기에 1등이 아니어서 ‘기억되지 못한 자’의 비애는 누구든 가지고 있으리라. 북신시장을 지나는 길에 우연히 들렀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억되지 못한 시장…
통영엔 재래시장이 무려 3개나 있다. 상설로 장이 서는 메이저급 시장만 해서 그렇다. 재래시장이 대기업의 대형할인마트 위세에 눌려 전국 곳곳에서 고사위기에 처해 있다는 심심찮은 소식들이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통영의 세 시장은 매우 특이하고 고무적인 현상이다. 도시규모가 수십만 또는 백만에 이르는 큰 도시도 아닌데, 통영보다 인구가 두 배 가까이나 많은 이웃 거제만 봐도 통영의 재래시장만한 시장 한 곳 없는데, E마트, 롯데마트 등 할인매장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럴까?
통영은 도시규모로는 소도시(2009년 기준 14만 여명)에 해당하지만 도시가 형성된 것은 삼도수군통제영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니 이미 400년이 넘은 역사와 전통의 도시다. 통제영의 존재는 이 도시를 인근 지역의 경제, 물류, 해상교통 등 많은 분야에서 중심지역할을 하게끔 만들었고, 나라의 공물을 운반하던 조운선이 통영(현재 영운리 마을)에서 출발했으니 주위의 물산들이 집결했을 것이란 짐작은 쉽게 할 수 있다.
또한 통영 땅은 지리산 취령에서 시작한 산줄기가 사천, 남해 등을 거쳐 김해까지 이어지는 낙남정맥의 한 지류가 끝나는 곳에 위치하여 예로부터 지기가 성해 많은 물산들이 끊임없이 생겨나는 풍수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통제영 시절 12공방에서 생산했던 나전칠기, 갓, 부채, 소목 등 생활공예품들이 ‘통영’ 이라는 명품브랜드로 전국에 퍼져나갔고, 아직까지 국내 유통량의 70% 정도를 담당하는 굴, 멍게, 활어 등이 통영바다에서 생산된 것들이며, 통영곳곳의 바닷가에서 크고 작은 배들이 건조되어 조선강국의 기초기반에도 한몫을 담당하고 있다. 덩치는 조그맣지만 화수분 같이 샘솟는 그 생산의 힘은 통영을 여타 도시와 구별 짓게 만드는 아이덴티티와도 같다.
시장은 자연발생적 교류의 장이므로 사통팔달 교통이 편리한 곳에 생겨나는 것은 지당하다. 그러나 자체의 생산이 없이 단순히 인근 지역의 물산이 모여드는 곳으로서의 시장은 시간적, 환경적 변화에는 속수무책이다. 넓고 큰 새 길이 나서 교통의 중심이 이동하면 자연 그 시장 역시 스러지고 마는 경우가 허다한 것만 봐도 그렇다.
통제영이 폐영된 이후에도 통영은 바다로부터 나오는 끊임없는 생산물이 있었기에 시장이 그 맥을 유지할 수 있었고, 관광도시로서의 인기까지 더해진 지금, 통영시장은 쇠퇴는커녕 북적거리는 인파로 넘친다.
여기까지가 통영지기가 늘 관성적으로 보아오던 통영시장에 대한 생각이다.일상적으로 동선의 한계가 서호시장과 중앙시장 주변이었을 뿐 북신시장은 딴 나라 시장처럼 멀게 느껴진 것은 나도 1등만 기억했기 때문이었을까?
북신시장은 거북시장이란 이름으로 시작했다.(사진은 북신시장 내 원래의 거북시장) 처음 시장이 형성된 곳에 있던 큰 건물이 거북상가맨션인지라 시장이름도 거북시장. 명료하고 소박하다.
거북시장이 북신시장으로 확장, 개칭되면서 원래의 거북시장 골목은 입주점포가 목좋은 곳으로 옮겨가버려 훌빈하다. 점주를 찾는 현수막이 애닯다. 북신시장과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시장안에 포함된 구역인데 상권은 참으로 예민한가보다.
휑한 골목 안에 전통을 고수하며 꿋꿋이 남아있는 ‘할매순대’. 순대 좀 씹어본(?) 통영 사람이라면 다 알만한 집이다.
시장이라고 하기엔 뭔가 부족한 듯한 손바닥만했던(?) 규모의 이 시장이 북신동 일대 세대수가 점점늘어가는 것과 발맞추어 커졌고 지금은 구 상권의 중심인 서호시장, 중앙시장과 비교해도 규모면에서 크게 뒤지지 않는다. 다만 활어, 건어물 등의 수산물 중심인 두 시장과 달리 북신시장은 생활시장으로써,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모습의 시장이다.
포근하고 따뜻함의 대가가 5천원 밖에 안한다. 재래시장의 매력은 이런게 아닌가?
시장엔 점포를 갖춘 점주들도 있지만 바늘구멍처럼 빠꼼해도 전을 펼칠 수만 있다면 그 자리가 곧 점포다. 상가앞에 출입구만 피해서 펼쳐진 또 다른 점포들.
늘어놓은 물건을 도합해도 10만원 어치도 채 안될 것 같은 채소전(?) 앞에 앉았다. “오이서 가꼬 온 물건입니꺼?”“집에서 키운 기거마는…”“배추 한통에 얼맙니꺼?”“사처넌”한눈에 봐도 속이 꽉 차 튼실하게 생긴 놈은 웬만한 아기보다 무게가 더 나갈 것처럼 보인다.
뜨끈한 숭늉 한사발도 나눔은 즐거운 것. 도란히 모여앉아 “사진 찍지 마이소.”를 연발하면서도 끊이지 않는 세 아주머니의 웃음소리가 숭늉보다 더 구수하다.
발길을 정한 것은 아니지만 없는 게 없는 시장은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다. 눈에 띄는대로 가보고 사진 찍고, 맘 내키면 즉석으로 흥정하여 사기도 하면서…
북신시장은 결코 잊혀진 시장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하는 일과 관련 지어 그 테두리안에서만 생각의 범위를 한정지어 온 내 생각이었다. 하나의 유기체와 같이 움직이고, 성장하고 하면서 이 시장을 이용하는 주변 사람들의 표정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고, 그것이 곧 우리가 사는 생활의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여행에서 우연이나 계획되지 않은 것을 만났을 때 기꺼이 즐기는 유형의 여행자라면 재래시장만큼 돌발요소가 많은 곳을 또 찾을 수 있을까?
ㅇ 시장 내 유명점포들낙원떡집
슈즈스토리(구 ‘신발백화점 모다’)
동신누비
장수불닭발과 동해건어물
그냥 죽집. ㅡ.ㅡ;;; 동지라고 어제, 오늘 특별히 가외 메뉴인 팥죽을 쑤었단다. 먹어보니 옛날맛 그대로… ^^
윤은수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