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신구에 박힌 보석이 빛의 각도에 따라 다른 빛을 발하듯 계절의 변화에 따라 다른 색의 옷으로 갈아입는 통영바다의 섬들을 시간의 흐름과 함께 지켜보는 즐거움은 자연이 베푸는 무한의 선물이다. 기상관측이래 가장 추웠다는 지난 겨울을 보낸 통영의 바다와 섬들은 올 봄 또 어떤 얼굴로 우리를 맞이할 지 미리 가본다.
통영의 봄은 바다에서 온다.육지임에도 4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바다의 땅’ 통영은 그 안에서의 삶이 바다와 연결되어 있고, 그래서 바다의 변화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 봄여름가을겨울 어떤 고기들이 언제 알을 낳는지, 언제 이 바다에 와서 언제 먼 바다로 가는지, 그 고기들이 어디에 주로 모여 사는지를 바다의 색깔을 보고 알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결에서도 감지하는 통영 사람들에게 봄도 역시 제일 먼저 바다에서 온다.
한산도 사랑길에서 본 내만
푸른색 일색인 바다, 그 한가운데 섬에서 만나는 빨강, 노랑 원색의 꽃들은 육지의 그것보다 훨씬 강렬하다. 배를 타고 15분이면 닿는 한산도는 ‘애걔, 달랑 이만큼…?’ 할 정도로 가까운 섬이지만 선착장에서 제승당에 이르는 우아한 하트모양의 해안산책로(필자는 ‘한산도 사랑길’이라 부른다.)는 통영의 250여 개 그 어느 섬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함함하다. 산책로 오른편의 바다내음과 왼편의 소나무에서 뿜어 나오는 맑은 공기를 마시며 동백도 만나고, -시차가 있긴 하지만- 개나리, 진달래를 즐기는 15분간의 산책은 고상한 봄나들이로 손색이 없다.
한산도에 핀 동백
꽃나무를 보고 쓰다 손조서*
園林花滿爛(화림화만란) / 숲 속에 꽃들이 활짝 피니 蛺蝶滿枝來(협접만지래) / 온 가지에 나비 날아오네 汝蝶莫貪愛(여접막탐애) / 나비야 탐내지 말거라 花非爲爾開(화비위이개) / 꽃이 너 때문에 핀 게 아니니
* 손조서(1432~?) : 자는 인보, 호는 격재. 조선 세조 때의 절의신. 영남학파의 종조인 김종직과 문장과 학술을 겨루었고, 김굉필, 정여창의 스승으로 대표저서로는 근사록(近思錄)이 있다.
한산도에서 만나는 원색의 봄꽃들은 선생의 시에 묘사된 나비가 아니어도 탐날지니 혹 탐심이 인다면 마음에 작은 쉼표 하나 찍었다 생각하고 거기까지 만족하자. 산책로가 다하는 지점에 제승당을 포함한 이순신 장군의 유적지가 이어지니 이 또한 즐거움일 테니까…
욕지도 유동마을 앞바다
조금 더 다이내믹한 활동을 좋아하는 이에게는 욕지도가 제격이다. 통영항에서 32km나 떨어진 먼 섬이기에 우선 배타고 가는 여정 자체가 즐거움이다. 뱃길 전체가 한려해상국립공원지역에 포함되는 욕지도 항로는 관광버스를 타고 명산 순례를 하듯 여객선 타고 예쁜 섬들을 두루 만나볼 수 있고, ‘새우깡’ 한 봉지면 수많은 갈매기들까지 희롱할 수 있으니 1시간(쾌속선 기준, 일발 카페리 1시간30분)의 뱃길이 지루할 새가 없다.
해안로 카트라이딩
욕지도는 우리나라 섬 중 랭킹 44위의 큰 섬으로 걸어서 섬을 관광하기는 무리고, 카페리에 차를 싣고 가 욕지도 순환로(약 22km)를 드라이브하는 방법과 현지의 카트(2인승 미니카)를 대여하여 라이딩을 즐기는 방법이 있다.(욕지도 카트라이딩 패키지는 아주 통영적인 여행사, 통구리투어 홈페이지 참조) 어떤 방법을 택하든 순환로 굽이를 돌 때마다 나타나는 환상적인 섬과 바다의 경치에 입을 다물 수 없고, 쑥을 비롯한 수많은 봄나물이 곳곳에서 피어나는 향기로 겨우내 움츠렸던 몸 속 에너지가 한번에 발산될 것이다.
욕지도 북면의 노대군도 일대
욕지도 노적마을
통영의 봄은 맛있다.바다에서 나는 먹거리라면 전 세계에 내놔도 뒤지지 않을 통영의 해산물은 봄에도 예외가 아니다. 막 살이 오르는 도다리는 초봄에 올라온 쑥과 함께 끓인 ‘도다리쑥국’으로도 좋고, 회로도 좋다. 특히 어린 도다리를 뼈째 썰어먹는 일명 ‘세꼬시’는 ‘땡초’(매운 고추)와 마늘 다대기를 된장과 함께 회에 찍어 먹을 때 그 맛이 최상이다.
또 하나의 봄철 대표음식은 바다의 꽃, 멍게. 울퉁불퉁 주황색 멍게 무더기를 끌고 가는 배는 영락없이 커다란 꽃무더기를 끌고 가는 마차 같다. 그 노랑과 주황의 색깔이 봄에는 더욱 선명해지며 향도 짙어 맛이 제일 좋을 때다. 별다른 요리 없이 그냥 썰어 초장에만 찍어 먹어도 향긋한 여운이 오랫동안 입 속에 남는다. 통영이 관광도시로 부각되면서 유명해진 통영일대의 향토음식인 멍게비빔밥도 봄의 맛이라 할 수 있다. 식당 메뉴라기보다는 집에서 쓱싹쓱싹 비벼먹던 음식이기에 식당마다 조금씩 레시피가 다르고 생멍게를 쓰는 데도 있고, 약간의 양념과 함께 발효시켜 쓰는 데도 있으니 취향 따라 봄 향기 가득한 비빔밥 한 그릇도 먹어볼 일이다.
도다리쑥국 멍게비빔밥
* 추천 맛집한산섬 식당 : 도다리쑥국, 642-8021, 정량동 소재통영맛집 : 멍게비빔밥, 641-0109, 항남동 소재 도다리회는 시장에서 활어 직접 구입하여 근처 초장집 가면 저렴하고 맛있게 먹을 수 있다.
겨울잠 자던 동물들이 깨어나기 시작하는 경칩이 코앞이다. 폭설과 한파가 유난히 거셌던 지난 겨울 동안 미루어두었던 여행이 있다면 이 봄, 주저 말고 맑은 바다의 내음을 따라 통영의 섬으로 떠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