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정신이 살아 숨 쉬는 통영 청년단회관
일제강점기에 건립된 옛 통영청년단회관은 3.1운동 기념관이자 청년단 활동의 중심 공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통영 청년단은 1919년 창단 이후 1931년 강제 해산될 때까지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항일 지하운동을 이어온 조직이었습니다. 현재 이 건물은 통영문화원과 충무고등공민학교의 건물로 활용되고 있으며, 근대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 통영의 청년들은 단순한 시위에서 벗어나 체계적인 독립운동이 필요하다는 자각을 바탕으로 박봉삼, 임철규, 이영재 등 지역 인사들이 모여 같은 해 7월 21일, 통영 청년단을 창단하였습니다. 박봉삼은 초대 단장으로 선출되었고, 341명의 회원이 뜻을 모았습니다. 이후 청년단은 독립운동뿐 아니라 교육과 계몽 활동에도 집중하며 민족정신 고취에 힘썼습니다.
청년단은 독립적 활동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회관 건립을 추진하였고, 이영재가 대화정의 부지를 기부하며 시작됩니다. 자금 부족과 일제의 방해 속에서도 유학생 출신 단원들이 북과 나팔을 울리며 모금 운동을 이어갔고, 임철규 단장은 자신의 재산과 문중 전답을 처분해 건축비를 마련했습니다. 그렇게 총공사비 1만 4천 원, 연건평 120평의 벽돌 2층 양옥 건물인 통영 청년단회관이 4년여에 걸쳐 1923년 11월 18일 완공되었습니다. 이 회관은 당대 통영군민에게 큰 의미의 상징물이 되었고, 준공식은 동아일보에도 크게 보도되었습니다.
청년단은 ‘지육부’를 중심으로 체계적인 교육 활동을 벌였습니다. 강세제, 김한기 등 강사들이 강습을 진행하였고, 수강생이 몰려 주야간으로 나뉘어 운영되었습니다. 강연 주제는 ‘아는 것이 힘이다. 우리도 배우자.’, ‘공중도덕을 지키자’ 등 계몽적 내용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항일 자주 의식을 고취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경찰은 고등계 형사를 배치해 감시했고, 강연이 민족의식으로 흐르면 중지 명령과 연행이 뒤따랐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1930년대 초까지 이어졌습니다.
청년단은 1923년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된 ‘조선물산장려운동’에도 적극 동참하여 ‘내 것, 조선 것, 우리 것’을 강조하며 국산품 애용을 장려했습니다. 강연회와 시가행진을 통해 주민 참여를 이끌었으며, 민족주의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사회의 신뢰를 받는 조직으로 기능했습니다. 이러한 활동들은 단순한 항일 조직을 넘어 오늘날 시민단체에 가까운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