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소개
통영은 예술과 역사가 어우러진 특별한 도시입니다. 오랜 세월 예술인들의 고향이자 통제영의 중심지였던 이곳은 유형과 무형의 문화재가 풍부하게 남아 있습니다. 도시 곳곳에 문화와 전통이 스며 있어, 어디를 걷든 그 자체가 문화기행이 되는 도시입니다.
차를 잠시 멈추고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면, 조선시대 300년간의 군영 터였던 통제영 유적지와 마주하게 됩니다. 세병관을 비롯한 주요 건물들이 복원되어 있어 과거의 영광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골목 곳곳에는 예술인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건물 벽면이나 안내판을 따라가다 보면 그들의 창작 세계를 조금씩 체감할 수 있습니다.
통영은 “고향 속에 세계가 있다”는 말처럼, 지역에서 출발해 세계로 뻗어나간 문화의 힘을 보여주는 곳입니다. 청마 유치환, 윤이상, 박경리 등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이곳에서 나고 자라 세계적인 예술의 지평을 열었습니다. 이들이 살았던 생가와 작품 배경지를 걸으며, 문학과 음악이 어떻게 삶 속에서 피어났는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코스는 차가 아닌 걸음을 통해 통영을 만나보는 여정입니다. 문화유산을 따라 걷는 길 위에서 마주하는 바다, 골목, 담장 하나하나가 하나의 이야기로 다가옵니다. 시인의 길, 예술인의 거리, 그리고 통영의 숨은 역사 현장을 연결하며 체험하는 이 문학기행은 문화도시 통영의 진면목을 느끼게 해 줄 것입니다.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해안광장 강구안은 통영 이순신광장을 중심으로 조성된 해안광장으로, ‘개울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입구’라는 의미에서 유래된 지명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삼도수군통제영 군항의 일부분으로 기능하였으며, 현재는 시민과 관광객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곳은 통영 도심 여행의 출발점으로, 다양한 공연과 휴식이 어우러지는 문화마당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복원된 거북선과 판옥선 강구안문화마당에는 실물 크기로 복원된 거북선 3척과 판옥선 1척이 정박되어 있습니다. 이 거북선들은 1990년 서울시가 해군에 의뢰해 제작한 것으로, 2005년 한강 하류 비무장지대를 통과해 한산대첩 전승지인 이곳 통영의 강구안으로 옮겨졌습니다. 관람객은 복원된 거북선 내부에 들어가 조선 수군의 선상 생활을 체험할 수 있으며, 수군 복장을 입고 사진 촬영도 가능합니다. 문화예술이 살아 있는 거리공연 무대 강구안은 통영의 거리예술 문화 중심지로서, 문화마당에서는 다양한 지역 예술가들이 공연을 펼칩니다. 시민과 관광객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야외공연, 거리 버스킹, 축제 행사 등이 연중 이어지며, 통영의 살아 있는 예술을 만날 수 있는 공간입니다. 특히 주말과 여름철에는 지역 공연팀과 방문 예술단의 무대가 자주 펼쳐집니다. 야경과 야간 축제가 어우러진 밤의 명소 낮에는 활기찬 분위기로 북적이는 강구안이 해가 지면 아름다운 조명이 켜진 밤바다와 어우러지며 야간관광 명소로 변신합니다. 거북선과 강구안브릿지 주변의 조명은 산책객과 관광객들에게 색다른 감성을 선사하며, ‘투나잇 통영!’ 시리즈로 알려진 다양한 야간 문화행사가 개최됩니다. 대표적으로 ‘나이트 프린지’, ‘모던보이즈’, ‘다이닝 페스타’와 같은 시민 참여형 축제가 이곳에서 펼쳐집니다. 여행 TIP 거북선 내부 관람은 개방 시간에 맞춰 방문하시는 것이 좋으며, 수군복 체험은 현장에서 신청 가능합니다. 밤에는 거북선과 브릿지 일대의 조명이 켜지므로 산책이나 사진 촬영 장소로 추천드립니다. 야간 문화축제 일정은 통영 야간관광 인스타그램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인근에는 통영중앙시장, 동피랑마을 등 주요 관광지가 밀집되어 있어 함께 둘러보시면 좋습니다.
통영에서 태어난 시인 초정 초정 김상옥은 1920년 음력 5월 3일, 경남 통영시 항남동 64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여섯 누이와 외아들로 자란 그는, 가족 모두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태어난 환경은 그를 ‘왕’처럼 만들었고, 그의 외고집적이고 거침없는 성격은 이러한 조건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난이 그를 단련시켰으며, 초정은 이를 두고 “가난이 곧 학교”였다고 표현했습니다. 시 「봉선화」의 배경 초정은 통영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출감한 뒤, 면회를 왔던 누님의 부름을 받아 함경북도 청진 인근으로 가게 됩니다. 처음 접한 추위와 낯선 말씨, 음식 속에서 그는 고향의 따뜻한 날씨와 사람들, 바닷가 음식을 그리워했고, 향수병에라도 걸렸을 것이라 말합니다. 시 「봉선화」는 그러한 감정과 기억 속에서 쓰이게 되었고, 『문장』 제3호(1939년 10월)에 실리며 초정의 등단작이 되었습니다. 남망산에 세워진 「봉선화」 시비 초정의 시 「봉선화」는 현재 남망산조각공원 상층부에 시비로 세워져 있습니다. 장독간, 봉선화, 꽃물 들인 손톱 등 소박한 시어들 속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가족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담겨 있습니다. 시비 앞을 지나는 이들이 쉽게 지나치지 못할 정도로 깊은 인상을 줍니다. 누님의 기억과 「누님의 죽음」 초정을 돌봐주던 누님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초정은 그 임종을 지켜보며 「누님의 죽음」이라는 시를 남겼습니다. ‘새도록 눈을 쓸어도 감지 않고 가드이다’라는 구절에는 누님에 대한 슬픔과 상실감이 절절히 담겨 있습니다. 문학계의 평가 초정의 시는 단 한 편으로도 주목받았습니다. 국문학자 가람 이병기는 「봉선화」를 두고 ‘타고난 시인이 아니고는 표현할 수 없다’고 했고, 미당 서정주는 ‘귀신도 곡할 만큼’ 슬픔이 담긴 시라며 초정의 감수성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여행 TIP 초정 김상옥의 생가는 통영시 항남동 64번지에 있으며, 「봉선화」 시비는 남망산조각공원 상층부에 위치합니다. 시 속 배경인 장독간과 꽃물, 누님과의 기억 등을 떠올리며 시비 앞에서 시를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봉선화」는 초정이 함경북도 청진 근처에서 머무르며 쓴 시로,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습니다.
통영이 품은 시인의 유년 기억 김춘수 시인의 시비가 자리한 남망산 입구의 쌈지 터는, 시인의 유년 시절 추억이 깃든 고향의 공간입니다. 시비가 처음 설치된 장소는 항남동 간선도로변이었으나, 남망산으로 오르는 초입으로 옮겨져 이제는 시인이 바라보던 바다, 들리던 갈매기 소리, 머물던 배들이 보이는 그 풍경 안에 존재합니다. 시인의 생가에서 엎드리면 닿을 거리, 그가 아침마다 처음 마주했을 푸른 물빛과 파도소리가 여전한 이곳은 시가 태어난 감성의 원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국민이 사랑한 ‘꽃’의 시비 ‘꽃’은 김춘수 시인의 대표작이자, 국내 시인들이 가장 애송하는 시로 손꼽히는 작품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첫 구절로 시작해 ‘그는 나에게로 와서 하나의 꽃이 되었다’는 표현은 인간 존재의 의미와 관계의 아름다움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이 시는 시인과 대중 모두에게 오랫동안 사랑받으며 수많은 낭송회와 행사에서 빠지지 않는 단골 레퍼토리가 되었습니다. 통영에서는 이 감동을 직접 마주할 수 있도록 ‘꽃’ 전문이 새겨진 시비를 세웠으며, 김춘수 시인의 자필 글씨로 새긴 점도 의미를 더합니다. 시비 건립에 함께한 시민의 마음 ‘꽃’ 시비는 통영시 예산이 아닌 시민 주도 모금으로 세워졌습니다. ‘꽃과 향기’라는 시민단체와 지역 신문사의 주도로 ‘꽃 한 송이’라는 모금운동이 펼쳐졌고, 초등학생부터 어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이 참여했습니다. 시비 뒷면에는 모금에 참여한 이들의 이름이 동판에 새겨졌으며, 이 시비를 바라보며 쓰다듬는 이들 중 다수는 시비 건립에 함께한 시민일 것입니다. 이는 한 편의 시가 공동체 속에서 얼마나 깊은 정서적 울림을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사례입니다. ‘꽃’이 태어난 기억의 조각들 김춘수 시인은 시 ‘꽃’의 시상 배경으로 유년기의 강렬한 인상들을 언급했습니다. 통영 장개섬의 바다, 새들을 갈매기라 착각했던 동심, 어머니와 함께한 저녁놀의 풍경, 봉선화가 피어있던 담장 아래의 추억 등이 한 겹 한 겹 쌓여 ‘꽃’이라는 시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의 시는 단순한 문학적 형상이 아닌, 개인의 체험과 감정, 그리고 고향이라는 정서적 기반에서 태어난 살아 있는 언어입니다. 여행 TIP 김춘수 시비는 남망산공원 입구 쌈지 터에 위치해 있으며, 시인의 생가와 도보로 이동 가능한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시비 앞에서는 바다와 갈매기, 정박한 배들이 어우러진 시인의 기억 속 풍경을 그대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남망산공원은 디피랑 야간 디지털 테마파크와도 인접해 있어, 낮에는 시비와 문학 산책을, 밤에는 빛의 산책을 함께 즐길 수 있습니다. 시비 뒤편의 동판에서 자신의 이름이나 지인을 찾아보는 소소한 재미도 경험해 보세요. 모금 참여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도심 속에서 만나는 청마의 시 통영시 중앙로와 청마거리가 만나는 삼각형 자투리 공간. 4차선 도로 확장에 따라 조성된 소공원 한켠에는 청마 유치환의 대표작 「향수」 시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관상용 조경 정도로 마무리될 수 있었던 자투리 공간을 시비로 채운 것은 통영이 예향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결정이었습니다. 이곳에는 나무 그늘과 의자가 설치되어 시민과 관광객 누구나 시를 읽으며 쉴 수 있는 작은 문학 정원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바로 옆에는 또 다른 시 「행복」 시비도 나란히 서 있어 두 편의 시가 서로 다른 감성으로 조화를 이룹니다. 비감한 고백이 담긴 「향수」 1934년 『동아일보』에 처음 발표된 후, 청마시초에 실린 「향수」는 고향과 단절된 시인의 고독과 내면의 갈등을 절절하게 담은 작품입니다. "나는 영락한 고독의 까마귀…"로 시작하는 이 시는 고향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자의 슬픔을, 이국의 거리에서 되새기는 비애로 그려냅니다. 비록 증오하며 떠났지만 결국 그리움을 지울 수 없다는 시인의 고백은, 인간 본연의 감정이자 문학적 통찰로 자리잡습니다. 정지용의 「향수」가 섬세하고 서정적이라면, 청마의 「향수」는 힘찬 남성적 시어로 표현된 고뇌의 노래입니다. 5천 통의 사랑, 「행복」 시비의 배경 통영 중앙동우체국 앞에 위치한 또 하나의 시비는 청마 유치환의 사랑을 상징하는 「행복」입니다. 이 시는 시조시인 이영도에게 보낸 수천 통의 편지 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고백의 결정체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는 이보다 행복하나니라.” 이 한 줄은 주체적 사랑, 내면의 충만함, 그리고 영혼의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시비는 우체국 창가에서 바로 볼 수 있도록 설치되어 있으며, 청마의 체취가 깃든 공간으로 많은 이들이 찾는 문학 성지가 되었습니다. 편지를 부치던 장소에서 직접 시를 만나는 이 경험은, 단순한 독서를 넘어선 깊은 감동을 전합니다. 시비에 담긴 사랑의 서사와 문학의 본질 「행복」 시에는 단지 한 편의 시 이상의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청마는 1946년 통영여중 교사로 부임한 이영도를 만나 평생에 걸쳐 편지를 주고받으며 플라톤적인 사랑을 이어갔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쓰여진 편지는 단순한 연정이 아닌, 시인의 존재 이유이자 삶의 구원과도 같은 행위였습니다. 청마는 “사랑을 받는 것은 내가 소유됨이요, 사랑하는 것은 내가 소유하는 것”이라며 사랑의 주체로서 존재하기 위한 시인의 열망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백은 시 「행복」에 그대로 녹아 있으며, 시비 앞에서 그 문장을 따라 읽는 순간 우리는 시인이 남긴 진정한 ‘행복’을 마주하게 됩니다. 여행 TIP 청마 ‘향수’ 시비는 통영시 중앙로 소공원 내에, ‘행복’ 시비는 인근 중앙동우체국 출입구 좌측에 설치되어 있어 도보로 함께 둘러볼 수 있습니다. 시비 앞에 놓인 벤치에 앉아 시를 소리 내어 읽어보세요. 청마의 내면을 더욱 가까이 느낄 수 있습니다. 이영도와 청마의 사랑 이야기를 배경으로 읽으면 「행복」 시의 의미가 더 깊어집니다.
세병관 길목에서 만나는 벅수 통영시 문화동, 세병관으로 오르는 도로 오른쪽에 위치한 이 벅수는 돌로 만든 장승(石長丞)으로, 통영 방언으로 장승을 ‘벅수’라고 부릅니다. 벅수는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마을 입구나 길가에 세워 수호신, 경계표지, 이정표의 역할을 해왔습니다. 유일한 남성 벅수, 토지대장군 문화동 벅수는 일반적인 남녀 한 쌍의 장승과 달리, 남성 하나만 세워진 독벅수 형태입니다. 몸 앞에는 ‘土地大將軍(토지대장군)’이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으며, 등 뒤에는 ‘光武十年八月 同樂洞 立’, 즉 1906년 8월 동락동에서 세웠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습니다. 풍수와 신앙이 만난 비보장승 이 벅수는 당시 동락동 주민들이 풍수지리설에 따라 동남쪽 방향이 허하다는 판단 아래, 허함을 보완하고 진압하기 위해 세운 비보장승입니다. 단순한 상징물을 넘어 마을의 수호와 벽사(辟邪), 축귀(逐鬼), 방재(防災), 진경(進慶)의 기원이 담긴 신앙적 조형물입니다. 험상궂지만 따뜻한 미소 벅수의 얼굴은 험상궂으면서도 미소를 머금은 독특한 표정을 하고 있어 민간 조형물로서의 미적 가치도 높습니다. 보기 드문 독벅수로서 통영 지역의 민속자료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여행 TIP 문화동 벅수는 세병관 진입로 오른편에 위치해 있어 세병관 방문 시 함께 둘러보시기 좋습니다. 벅수에 새겨진 음각 문자와 조형미는 가까이에서 직접 관찰하시면 더욱 생생하게 느끼실 수 있습니다. 풍수지리와 민간신앙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께 흥미로운 문화유산 체험이 될 것입니다.
1645년 창건과 복원 과정 운주당은 인조 23년(1645년), 제21대 통제사 이완이 경무당과 함께 창건한 건물입니다. 통제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2003년 복원되었으며, 세병관 동쪽의 내아군 영역에 위치해 있습니다. 통제사의 집무 공간 운주당은 통제사가 군무를 보던 집무실로 사용된 건물입니다. 삼도수군통제영 내에서도 통제사의 실제 업무 공간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운주’라는 이름의 의미 운주라는 명칭은 ‘운주유악지(運籌帷幄之)’에서 유래하였으며, 이는 ‘군막 속에서 전략을 세운다’는 뜻입니다. 이름 그대로 운주당은 군사 전략과 행정을 담당하던 장소입니다. 여행 TIP 운주당은 세병관 동쪽에 위치한 내아군에 있으므로 삼도수군통제영 유적지를 관람하며 함께 둘러보기에 적합합니다. 건물의 이름이 지닌 뜻을 알고 관람하면 통제사의 역할과 공간 활용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습니다.
조선 수군의 위용을 보여주는 객사 세병관은 조선시대 통제영의 객사로, 제6대 통제사 이경준이 통제영을 현재 위치로 옮긴 이듬해인 1605년에 처음 세워졌습니다. 이후 제35대 통제사 김응해가 1646년에 규모를 크게 확장해 다시 지었고, 제194대 통제사 채동건이 1872년에 개수하였습니다. 정면 9칸, 측면 5칸의 9량구조 단층 팔작지붕 건물로, 장대석 기단과 50개의 민흘림 기둥을 갖추고 있으며, 벽체와 창호 없이 통칸으로 시원하게 트여 있는 구조가 특징입니다. 세병관의 구조와 건축적 특징 세병관은 조선시대에 건립된 건축물 중 바닥면적이 가장 넓은 건물 중 하나로, 경복궁의 경회루, 여수의 진남관과 함께 손꼽히는 대형 건물입니다. 우물마루와 연등천장이 설치되어 있으며, 내부 중앙 3칸은 한 단을 올려 전패단을 구성하고, 상부는 소란반자로 마감하였습니다. 이 공간은 3면에 분합문을 두어 위계를 강조하였습니다. 전체적으로 질박하면서도 웅장한 건물의 위용은 통제영의 기상을 잘 보여줍니다. 세병관이라는 이름의 의미 ‘세병’이란 이름은 ‘만하세병(挽河洗兵)’에서 유래된 것으로,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씻는다’는 뜻입니다. 이 이름은 세병관의 상징성과도 맞닿아 있으며, 정면에 걸린 ‘세병관(洗兵館)’이라는 현판은 제137대 통제사 서유대가 쓴 글씨입니다. 군사 시설이자 상징적인 공간으로서의 세병관은 그 이름과 구조 모두에서 조선 수군의 정신을 느낄 수 있게 합니다. 여행 Tip 세병관은 정면 9칸, 측면 5칸 규모의 단층 팔작지붕 건물로 조선시대 객사의 건축 양식을 관찰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현판 ‘세병관(洗兵館)’은 제137대 통제사 서유대가 직접 쓴 글씨입니다.
1645년 창건과 복원 과정 운주당은 인조 23년(1645년), 제21대 통제사 이완이 경무당과 함께 창건한 건물입니다. 통제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2003년 복원되었으며, 세병관 동쪽의 내아군 영역에 위치해 있습니다. 통제사의 집무 공간 운주당은 통제사가 군무를 보던 집무실로 사용된 건물입니다. 삼도수군통제영 내에서도 통제사의 실제 업무 공간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운주’라는 이름의 의미 운주라는 명칭은 ‘운주유악지(運籌帷幄之)’에서 유래하였으며, 이는 ‘군막 속에서 전략을 세운다’는 뜻입니다. 이름 그대로 운주당은 군사 전략과 행정을 담당하던 장소입니다. 여행 TIP 운주당은 세병관 동쪽에 위치한 내아군에 있으므로 삼도수군통제영 유적지를 관람하며 함께 둘러보기에 적합합니다. 건물의 이름이 지닌 뜻을 알고 관람하면 통제사의 역할과 공간 활용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습니다.
통영의 정신을 지키는 문화 공간 통영문화원은 지역의 고유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중심 기관으로, 통영의 정신적 지주이자 향토문화예술의 나침반 역할을 해오고 있습니다. 향토문화 창달을 위한 다양한 도서 발간과 교육사업을 통해 지역 정체성을 지켜가고 있으며, 시민들과 함께하는 다양한 문화행사를 꾸준히 개최해 왔습니다. 다채로운 문화 활동과 교육 프로그램 통영문화원은 한국문화학교를 운영하며 지역민 대상의 사회교육 역할도 수행하고 있습니다. 학술발표회, 민속놀이, 연날리기 대회 등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프로그램은 물론, 국제문화교류 활동도 함께 추진하고 있으며, ‘통영문화 가족인의 밤’ 등 지역민 참여형 문화행사도 운영 중입니다. 어르신 문화 프로그램, 향토사 조사 및 유적 답사 등 폭넓은 활동을 통해 세대와 분야를 아우르는 문화 전파의 거점이 되고 있습니다. 시설 개요 및 공간 구성 통영문화원은 통영시 서문로 23에 위치하고 있으며, 부지면적 1,616㎡, 연면적 1,243.87㎡ 규모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지하 1층에는 다목적실, 방송실, 전기실, 기계실이 마련되어 있으며, 지상 1층에는 전시실, 자료보관실, 원장실, 사무국이, 2층에는 문화교실, 향토사연구소, 자료보관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해당 건물은 2010년부터 2013년까지 총 45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건립되었습니다. 이용 정보 및 문의 안내 통영문화원은 평일에만 운영되며, 토요일, 일요일, 공휴일은 휴원합니다. 문의는 통영문화원 사무국(055-646-3310)으로 가능합니다. 지역의 문화 활동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언제든 방문해 교육 프로그램과 전시를 체험하실 수 있습니다. 여행 TIP 문화원 내부 전시실은 지역사와 예술에 관심 있는 분들께 특히 추천드립니다. 방문 전 휴원일과 프로그램 운영 일정을 확인하시면 더욱 알찬 관람이 가능합니다. 향토사연구소나 문화학교 프로그램은 지역 주민뿐 아니라 외부인도 참여 가능한 경우가 많습니다.
간창골에 남은 오래된 우물 간창골 우물은 통영시 문화동, 옛 통영청년단회관(현 통영문화원) 아래 일대에 위치해 있으며, 이 지역은 과거 '간창골'이라 불렸습니다. 이 우물은 통제영시대 9정(九井) 중 하나로 기록된 ‘서구상로변정(西舊上路邊井)’에 해당하며, 관청골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던 식수원이었습니다. 한때 ‘간창골 샘’이라 불리며 마을의 중요한 생활 시설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일상의 중심이었던 공동우물 상수도 보급 이전까지 간창골 우물은 주변 주민들의 주요 식수원으로 사용되었으며, 특히 아낙네들이 모여 물을 긷고 이야기를 나누던 생활공간이었습니다. 지금은 사용되지 않고 있으나, 당시에는 소통과 생활의 중심지로 기능하며 마을 공동체의 일부를 이루었습니다. 박경리 소설 속의 간창골 박경리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에서는 간창골이 주요 배경으로 등장하며, 이 우물은 작품 속 인물들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된 공간으로 묘사됩니다. 우물가에 모인 이웃들이 김약국의 딸들에 대한 소문을 나누는 장면은 당시 사람들의 생활과 정서를 실감 나게 보여줍니다. 소설을 통해 간창골 우물은 문학적으로도 의미 있는 장소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여행 TIP 현재 우물은 사용되지 않지만, 통제영 시대의 9정 중 하나로 지역 생활사와 문학을 함께 돌아볼 수 있는 장소입니다. 박경리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 속 장면을 미리 읽고 방문하면, 우물과 주변 공간이 문학적으로 더 깊이 다가옵니다.
통영성을 지나던 경계의 고개 서문고개는 문화동과 명정동을 가르는 고갯마루로, 과거 통영성의 서문이 있던 곳에서 유래해 ‘서문고개’ 또는 ‘서문까꾸막’이라 불립니다. 문화동 간창골에서 충렬사나 명정샘으로 향하려면 반드시 이 고개를 넘어야 했으며, 폭이 좁아 마주 오는 사람 중 한 명은 비켜 서야 할 정도로 협소한 길이었습니다. 현재는 일부 구간이 통영문화원 옆을 관통하는 2차선 도로로 확장되어 원형이 훼손되었지만, 나머지 구간은 옛 모습 그대로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박경리 소설의 주요 배경지 소설가 박경리의 작품 속에서 서문고개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중요한 공간입니다. 『김약국의 딸들』에서는 주요 사건이 이 고개를 오르내리며 전개되고, 『토지』에서도 이 고개는 배경의 하나로 자주 등장합니다. 박경리에게 서문고개는 단지 이야기 속 배경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의 현장이기도 했습니다. 박경리의 유년 시절이 남은 공간 박경리는 서문고개 안쪽의 후미진 집에서 태어나, 단출한 살림을 꾸리던 어머니와 함께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집을 떠나 새살림을 차렸고, 박경리는 어머니와 단둘이 이 고개에서 살아가며 책을 손에서 놓지 않던 소녀로 자랐습니다. 당시 그녀는 세병관 인근 초등학교에 다니기 위해 하루에도 여러 번 이 고개를 넘었으며, 이후 시집을 갔다가 남편과 사별한 뒤에도 고향 서문고개는 그녀의 삶의 배경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시인 백석의 발걸음도 스친 길 서문고개는 소설뿐 아니라 시에도 등장하는 길입니다. 시인 백석은 사랑했던 여성 ‘난’을 만나기 위해 이 고개를 넘어 명정골로 향했다고 전해지며, 그 시적 정서 역시 서문고개의 풍경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여행 TIP 서문고개는 문화동과 명정동을 잇는 고갯길로, 충렬사와 명정샘 등 인근 장소들과 가까워 함께 방문하기에 좋습니다. 서문고개 주변에는 박경리 생가와 『김약국의 딸들』의 표지석이 위치해 있어, 작가의 유년기 배경을 현장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장소이므로, 『김약국의 딸들』 또는 『토지』의 해당 구절을 참고하면 이해와 감상이 깊어집니다.
충렬1길 골목 끝, 박경리 생가 통영시 충렬1길 76-34, ‘서문고개’에서 뚝지먼당으로 향하는 길목에 박경리 작가의 생가가 있습니다. 이곳은 명정동과 문화동을 가르는 고지대인 현재의 배수지 일대로, 과거 독사(纛祠)가 있던 언덕이었습니다. 이 ‘독’은 군영을 상징하는 깃발로, 그 터를 ‘뚝지먼당’, ‘쭉지먼댕이’ 등으로 불렀고, 지역 발음에 따라 둑사, 뚝사로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생가는 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무대인 서문고개 표지석에서 가까운 골목 안쪽에 있으며, 골목 끄트머리 오른편 건물이 박경리 작가가 태어난 집입니다. 시로 밝힌 출생의 이야기 박경리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 직접 쓴 시 「나의 출생」을 통해 상세히 밝히고 있습니다. 시는 1926년 음력 10월 28일, 가난했던 외가에서 태어난 배경과 태몽, 산통의 순간, 어린 부모의 모습까지 세세히 담고 있습니다. 특히 어머니의 태몽으로 용이 등장했으며, 실제 어머니의 이름이 '용수(龍守)'였다는 우연까지 더해져 시적 감흥을 줍니다. 이 시는 작가 개인의 가족사와 함께, 그녀가 삶을 어떻게 기억하고 문학으로 재현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소설과 시의 무대가 된 공간 박경리 생가 주변은 소설 『김약국의 딸들』, 『토지』 등 통영을 배경으로 한 작품의 무대이자, 시적 상상력의 근원이 된 장소입니다. 서문고개와 뚝지먼당 등은 실제로 박경리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작가의 문학과 현실이 교차하는 지점으로 평가됩니다. 이 생가는 단순한 출생지가 아니라 박경리 문학의 출발점이자 통영이라는 지역이 한국문학 속에 살아 숨 쉬는 장소입니다. 현재의 생가와 보존 현황 박경리 작가가 태어난 집은 외관상 일부 수리를 거친 흔적이 있으며, 현재는 다른 사람이 거주 중이라 내부 출입은 어렵습니다. 방문 시 외부에서 조용히 관람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생가 주변은 박경리 문학의 주요 배경지로 문학적 정서를 함께 느낄 수 있는 장소입니다. 여행 TIP 박경리 생가는 충렬1길 76-34에 위치해 있으며, 서문고개 표지석에서 가까운 골목 안쪽 오른편에 있습니다. 방문 전 박경리의 시 「나의 출생」을 읽고 가면 생가에 얽힌 가족사와 문학적 배경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현재는 일반 가정집으로 사용되고 있으므로 외부에서 조용히 관람하는 것을 권장합니다.
장석이란 무엇인가 장석은 목가구의 금속 장식품으로, 구리와 아연을 합금한 황동 재질의 두석을 사용해 만들어집니다. 장석은 가구의 모서리나 연결 부위에 부착되어 장식성과 실용성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전통 금속 공예의 한 형태입니다.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용어이지만, 그 아름다움과 정교함은 한 번 보면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전통시대에는 이를 제작하던 장인을 두석장이라 불렀으며, 통영은 이러한 두석장이 활동하던 중심지였습니다. 장석은 수작업으로 제작되며, 나비·태극·박쥐·학·봉황 등의 다채로운 문양이 특징입니다. 2천여 종에 달하는 장석들은 작지만 섬세하고 아름다우며, 전통 가구의 품격을 높이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통제영과 12공방, 두석장의 역사 1604년 조선 수군의 본부인 삼도수군통제영이 통영의 두룡포로 옮겨오면서, 군수품과 공예품 생산을 위한 12공방이 설치되었습니다. 이 중 ‘두석방’에서는 가구 장식에 쓰이는 장석과 자물쇠를 주로 제작했으며, 이 작업을 담당하던 장인을 두석장이라 했습니다. 두석장은 금속을 다루는 장인으로 목공예 장인인 ‘나무쟁이’와 함께 가구 제작의 한 축을 담당했습니다. 장석은 가구의 용도나 나무의 종류에 따라 재질과 형태가 달라졌고, 단순한 부속품을 넘어서 가구의 미학을 완성시키는 중심이었습니다. 통영의 장석장, 김덕룡과 김극천 통영의 명정동에는 3대째 장석장을 이어온 김덕룡의 가문이 있습니다. 김덕룡은 1916년 출생해 평생 장석 제작에 헌신했고, 1996년 81세의 나이로 별세하기 전까지 한국 전통 금속 공예의 정수를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뒤를 이은 아들 김극천은 200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64호 장석장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어 전통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김극천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부친의 일을 도우며 자연스레 기술을 익혔고, 군 제대 후 본격적으로 가업에 전념했습니다. 그는 “배운 재주를 썩히지 말라”는 부친의 말을 가슴에 새기며, 장인의 정신과 기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장석의 예술성과 문화적 가치 장석은 단순한 금속 장식품을 넘어 예술로 평가받습니다. 장석에 새겨진 문양은 복을 상징하는 학, 다산을 뜻하는 물고기, 장수를 기원하는 십장생, 품격을 상징하는 봉황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물쇠와 경첩조차도 실용성과 함께 미적인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통영에서 제작되는 ‘나비장석’은 대표적인 명물로 평가받습니다. 장석 공예는 기술(craft)과 예술(art)의 조화를 이루며, 그 전통성과 조형미는 오늘날에도 높은 가치를 지닙니다. 장석장은 단순한 기술자가 아닌 예술가로서의 소명을 갖고 있으며, 그의 작품은 한국 전통미의 정수를 보여주는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여행 TIP 장석장 전통 공방이 위치한 명정동 일대는 산책하듯 걸으며 통영의 전통과 예술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장소입니다. 공예품 전시관이나 박물관을 방문하면 실제 장석 작품을 가까이에서 감상할 수 있어 전통 공예의 아름다움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관람 전 장석과 두석에 대한 간단한 배경지식을 익히면 작품 감상의 깊이가 더해집니다.
통영에서 태어난 영부인 공덕귀 여사(1911~1997)는 대한제국 군인이었던 공도빈과 방말선 사이에서 5녀 2남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가 태어난 통영의 집에는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영부인 공덕귀가 살았던 곳’이라는 표지석과 함께 ‘충렬4길 26’이라는 안내표시판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서른다섯 살에 홀로 된 어머니는 바느질로 자녀들을 키워냈고, 공덕귀 여사에게는 믿음 깊고 강직한 어머니로 기억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투옥되었고, 재건교회를 세워 장로로 평생을 헌신하였으며, 지역 여인들과 성경공부와 찬송을 함께하며 교류했습니다. 선교사의 꿈을 품은 청년 시절 공덕귀 여사는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유치원 조보모와 통영진명여학교 야간 교사를 하며 학업과 사회생활을 병행했습니다. 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인도 선교사를 꿈꾸던 그녀는 21세에 호주선교부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동래일신여학교에 입학합니다. 피아노와 수영에 능하고 ‘만가지 약장수’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다재다능했으며, 졸업식에서는 우등상, 도지사상, 4년 개근상을 모두 수상한 최우등생이었습니다. 신학 공부와 감옥 생활, 그리고 실천 졸업 후 선교사 부인의 한국어 선생이 되어 거창에 머물던 중, 교회 행사에서 금지된 곡을 불렀다는 이유로 5일간의 감옥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장학생으로 다시 선발되어 요코하마 신학교에서 4년간 신학을 공부하였으며, 박용길 선생과 함께 주일학교를 인도했습니다. 29세에 김천 황금동교회 전도사로 부임하며 정대위, 조선출, 김정준 목사 등과 인연을 맺었고, 이곳에서 독립운동 관련 고문까지 겪습니다. 다시 송창근 목사의 권유로 요코하마 공립신학교(후에 도쿄여자신학전문학교) 4학년에 정규 입학하여 졸업한 후 8.15 광복을 김천에서 맞았습니다. 조선신학교 교수로의 활동 광복 이후 송창근 목사의 상경에 이어 1945년 12월 말 공덕귀 여사도 서울로 올라가, 1946년 1월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 여자신학부 교수로 재직하게 됩니다. 이 시기 조선신학교에는 한경직, 김재준, 송창근, 정대위, 조선출 목사 등 한국 현대신학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퍼스트레이디 그리고 그 이후 1948년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 유학을 앞두고 있었던 공 여사는 주변의 권유로 당시 서울시장이던 윤보선과 결혼합니다. 4.19혁명 후 윤보선이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퍼스트레이디가 되었지만, 5.16 군사 쿠데타로 인해 1962년 3월, 대통령직 하야와 함께 6개월 만에 경무대를 떠나게 됩니다. 이후 공 여사는 구속자 석방운동, 기생관광 반대운동, 원폭 피해자 돕기 운동 등 다양한 사회운동을 전개했으며, 구속자가족협의회 의장과 YH대책위원으로 활동하며 박정희 정권에 항거하기도 했습니다. 1990년 윤보선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안국동 자택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냈으며, 자서전 『나 그들과 함께 있었네』를 남겼습니다. 여행 TIP 공덕귀 여사의 생가는 통영시 충렬4길 26에 위치하며,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영부인 공덕귀 여사 생가’라는 표지석과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공 여사의 유년 시절은 통영의 선교사 활동, 기독교 확산과도 맞닿아 있으며, 그녀의 사회적 실천의 기초가 된 공간으로 의미를 지닙니다. 자서전 『나 그들과 함께 있었네』에는 통영 시절을 포함한 공 여사의 생애 전반이 기록되어 있어, 방문 전 참고하면 이해의 폭이 넓어집니다.
왕명이 내려진 정문의 건립 이 정문(旌門)은 조선 고종 20년(서기 1883년), 왕명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이는 당시 국가로부터 효성과 정절을 높이 평가받은 인물에게 내리는 최고의 영예 중 하나로, 단순한 구조물이 아닌 덕행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함안조씨의 행적은 왕에게까지 전해졌고, 이를 기리기 위한 표상으로 이 정문이 건립된 것입니다. 증참판 김귀반의 아내, 함안조씨 정문의 주인공은 증참판(贈參判) 김귀반(金貴攀)의 아내이자, 오위장(五衛將) 김시진(金時鎭)의 어머니인 함안조씨(咸安趙氏)입니다. 그녀는 효성을 다하여 부모님을 모셨으며, 정성을 다해 남편을 받들었습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는 그 시대를 살았던 여인으로서 매우 모범적인 것이었으며, 후대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효성과 정절을 전한 행적 함안조씨는 단지 가족을 위한 헌신을 넘어, 유교적 가치관이 중시되던 시대 속에서 이상적인 여인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는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심과 남편에 대한 정성과 충절로 가득 차 있었고, 이는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 뜻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행 TIP 정문은 조용한 마을이나 고택 인근에 위치한 경우가 많아, 방문 전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함안조씨와 관련된 정문 외에도 인근 지역의 다른 유교 유적지와 함께 둘러보면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정문에 새겨진 한자 문구나 구조적 특징을 자세히 살펴보면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과 문화적 상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순신 장군을 모신 사당 충렬사는 통영시 명정동 213번지에 위치한 사당으로, 임진왜란 당시 수군통제사로서 큰 업적을 남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이 사당은 1606년 제7대 통제사 이운룡이 왕명을 받아 창건하였으며, 1973년에 사적 제23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음력 2월이면 경내에 피어나는 네 그루의 동백나무가 청렴하고 절조 있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여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경내 구성과 명나라의 예물 충렬사에는 정침을 비롯하여 내삼문, 동제, 서제, 중문, 숭무당, 경충제, 외삼문, 비각 6동, 강한루, 전시관, 홍살문 등 총 24동의 건물이 자리하고 있으며, 경역은 약 9,068㎡에 이릅니다. 전시관에는 명나라 신종황제가 하사한 8가지 예물인 명조팔사품(보물 제440호)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중 의장물로 도독인의 1점과 함께 호두령패, 귀도, 참도, 독전기, 홍소령기, 남소령기, 곡나팔 등은 각 2점씩 보존되어 있어 귀중한 역사 자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향사와 민담으로 이어지는 역사 교육의 장 충렬사에서는 매년 춘계향사, 추계향사, 그리고 4월 28일 이순신 장군의 탄신제 행사가 열려 장군의 위훈을 기리는 뜻깊은 시간을 제공합니다. 이와 함께 충렬사에는 명정샘에 얽힌 신비로운 민담이 전해지며, 이를 통해 후세와 외국인 관광객에게 이충무공의 정신을 전하는 교육의 장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여행 Tip 충렬사는 1606년 왕명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현재 사적 제23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경내 전시관에서는 명나라 신종황제가 내린 명조팔사품(보물 제440호)을 관람할 수 있습니다. 매년 춘계향사, 추계향사, 4월 28일 탄신제 등이 열려 장군의 위훈을 기립니다.
시인 백석이 찾은 우물 통영은 우물 하나에도 이야기가 깃든 도시입니다. 시인 백석이 사랑한 여인 ‘난’을 찾아 통영을 방문했을 때 들른 곳이 충렬사와 명정샘입니다. 백석은 충렬사 계단에 앉아 「통영」이라는 시를 남겼으며, 그 시에서는 정당샘을 ‘명정샘’이라 표기하였습니다. 문학에 등장한 명정의 흔적 소설가 박경리 역시 작품 속에 명정을 자주 등장시켰습니다. 『토지』 제5부 1권에서는 등장인물 영선이 명정리 빨래터로 향하는 장면이 묘사되며, 일상과 연결된 장소로서의 명정이 소개됩니다. 이처럼 명정은 통영 지역 문학과 생활 속에 깊이 자리 잡은 공간입니다. 두 개의 우물, 일정과 월정 정당샘은 통영사람들에게 신성한 우물로 여겨져 왔습니다. 조선 제51대 통제사 김경이 1670년경 우물을 팠다고 전해지며, 초기에 단일 우물을 팠을 때는 물이 탁하고 마르기 쉬웠지만, 두 개의 우물을 동시에 파자 맑은 물이 풍부히 솟았다고 합니다. 윗우물은 일정(日井), 아랫우물은 월정(月井)이라 불렀고, 일정은 충렬사 전용, 월정은 민가용으로 사용되었으며, 두 우물을 통칭하여 명정(明井)이라 하였습니다. 정당샘이라는 이름의 유래 우물 위로 상여나 시신이 지나가면 물이 흐려졌다는 전설이 있어, 이를 금기시하였고, 두 우물을 하나로 합쳤을 때 물이 붉게 변하고 전염병이 돌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이후 다시 두 개의 우물로 복원되었으며, 햇빛을 받아야 물이 흐려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현재까지도 우물 위에 지붕을 세우지 않고 있습니다. 명정은 ‘밝은 우물’이란 뜻이며, 충렬사 아래에 위치한 점과 충렬사를 ‘정당(正堂)’이라 불렀던 점에서 이 우물을 ‘정당샘’ 또는 ‘정당새미’라고도 불렀습니다. 여행 TIP 정당샘은 충렬사 아래에 위치하며, ‘명정’보다 ‘정당새미’라는 이름으로 통영 주민들에게 더 익숙하게 불리고 있습니다. 우물은 햇빛을 받아야 물이 흐려지지 않는다는 전승에 따라 현재까지도 지붕 없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백석의 시 「통영」과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 등장하는 장소로, 문학과 역사를 함께 느끼며 방문하기에 적합한 장소입니다.
전기불터, 나전장 송주안의 생가 통영시 명정동의 옛 전기회사 자리에는 ‘전기불터’라는 표지석과 함께, 이곳이 나전장 기능보유자 송주안의 생가였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나전’은 소라나 전복껍데기를 사용해 장식한 공예품으로, 그 위에 옻칠을 더해 만들어지는 공예 기술입니다. 이러한 기법을 활용해 공예품을 제작하는 장인을 ‘나전장’이라 부릅니다. 통영 나전칠기의 기원 통영의 나전칠기 기술은 18세기 초 고선오의 청패세공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고선오는 통영에서 기술과 명성을 널리 떨쳤으며, 그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 약 50명의 제자가 모였습니다. 이후 1913년에는 데라우찌 총독이 통영의 청패세공에 주목하여 박정수와 박목수에게 장려금과 제자 양성비를 지원하였고, 박정수 문하에서는 송주안과 김봉룡이라는 뛰어난 제자가 배출되었습니다. 이 두 인물은 통영 나전칠기의 주축을 이룬 장인들입니다. 나전장 송주안의 생애 송주안은 1901년에 태어나 1917년 통영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박정수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나전칠기를 배웠습니다. 이후 전성규에게 사사하여 일본 도야마현 다카오카시에 위치한 '조선나전사'에서 8년간 기술을 연마하였고, 귀국 후 서울에서 2년간 활동하였습니다. 이후 통영으로 돌아와 일본인 하시다가 설립한 통영칠기주식회사에 발탁되어 10년간 근무한 뒤, 잠시 평안북도 태천군립칠공연구소에 소장으로 파견되었으며, 이후 다시 통영으로 돌아와 제2공장장으로 재직하며 제자를 양성하였습니다. 3대에 걸친 끊음장 가업 송주안은 1966년 나전칠기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1979년 5월 24일 중요무형문화재 제54호 ‘끊음장’으로 지정되었으며, 1981년 7월 10일 별세했습니다. 그의 아들 송방웅은 1990년 10월 10일 끊음장으로 지정되며 가업을 이어받았고, 현재는 손자 송경준이 이수자로서 3대째 전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여행 TIP 전기불터는 명정동의 옛 전기회사 터에 위치하며, ‘전기불터’ 표지석과 함께 나전장 송주안의 생가였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나란히 설치되어 있습니다. 표지석은 송주안이 활동한 통영 나전칠기 공예의 역사적 배경과 함께 그의 예술적 가치를 간략히 소개하고 있어, 현장에서 통영공예의 뿌리를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장소는 통영 청패세공과 나전칠기의 대표 인물 송주안의 출발점으로, 이후 3대째 끊음장으로 이어지는 가업의 시작을 되새겨볼 수 있는 의미 있는 공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