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마 유치환의 시혼이 서린 언덕 위 시비
통영 남망산공원 입구 오른쪽 언덕길을 따라 오르면, 동백꽃과 수목이 어우러진 풍경 속에 우뚝 선 청마 유치환의 ‘깃발’ 시비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 시비는 1974년 9월, 충무청년회의소가 시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유치환이 생전에 자주 오르내리며 시심을 키웠던 바로 그 언덕에 세워졌습니다.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7년 만에 세워진 이 시비는 통영 시민들이 그에게 품은 애정과 존경의 깊이를 짐작하게 합니다. 언덕을 오르며 마주하는 코발트빛 통영 앞바다와 야외조각공원의 조형미는 시와 자연, 예술이 어우러지는 감동을 더합니다.
시 ‘깃발’은 유치환 문학의 대표작 중 하나로, 순정한 이념과 시대에 대한 저항, 그리고 인간 내면의 고독과 열망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이라는 첫 구절부터 마지막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에 이르기까지, 시인은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정신의 기치를 시로써 형상화합니다.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은 고독하면서도 고결한 삶의 방향을 제시하며, 시인의 굳건한 세계관과 시대를 향한 절절한 목소리를 전달합니다. 시비 앞에 서서 이 시를 읽노라면, 바다를 향해 흔들리는 깃발 하나가 곧 시인의 정신처럼 느껴집니다.
시비 뒷면에는 충무청년회의소의 헌사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라 지역 사회가 시인을 기리는 방식이자 문학적 유산을 후대에 전하는 문화적 메시지입니다. 헌사에는 청마가 살아온 시대의 고난과 그의 시혼이 담긴 예술정신에 대한 깊은 존경이 표현되어 있으며, “그의 고독한 절규는 ‘내 눈을 뽑아 북악의 산성에 걸리라’는 분노로 이어졌다”고 회고합니다. 누가 썼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청마의 시정신을 잘 담아낸 명문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유치환(1908~1967)은 통영에서 태어나 1931년 《문예월간》에 ‘정적’으로 등단한 이래 생명파 시인으로서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서정주, 김동리와 함께 활동하며 생명력과 정신성을 중시한 시를 써왔으며, 대표작으로는 《청마시집》, 《울릉도》, 《보병과 더불어》, 《구름에 그린다》 등이 있습니다. 시뿐 아니라 교육자로도 활동한 그는 인간 존재의 고독과 자유, 의지와 애정을 시로 표현하며, 문학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청마는 단순한 낭만주의자가 아닌, 자신의 삶 전체로 시를 써내려간 예술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