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장마 아니랄까봐 구름인지 안개인지 구분이 안 되는 작은 물방울들이 이리저리 무리 지어 다니다가도 해가 잠깐 나오는가 하면 다시 빗방울이 후두둑… 변덕스런 일기 탓에 갑자기 할 일을 잃은 주말, 그 구름과 안개를 따라가보리라 즉흥에서 등산화를 챙긴다. 한산도 망산을 목적지로 정했지만 기필코 그 곳을 가고야 말 것이라는 마음보다는 망산 쪽으로라면 어디든 어떻게든 좋을 것이라는 심정으로…
유람선에 오르자마자 거친 물살과 사나운 비구름을 뚫고…가 아닌 예의 그 비단결 같은 바다와 다가가면 꼭 그 만큼 저 멀리 가 있는 해무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15분여 만에 한산도에 닿는다.
등산로는 일찍이 보아두었던 충무공유적지 내 한산정 옆으로 난 오솔길로 정했지만 ‘관계자 외 출입금지’ 된 길이라 관리사무소에 얘기를 해본다. 예상대로 거절을 당하는가 하는데 제승당을 오가며 몇 년간 얼굴을 익히고 인사를 해 온 직원 한 분이 개방된 등산로를 두고 왜 굳이 그 길로 가려하냐기에 ‘개인적 호기심’때문이라 차마 말하지 못하고 여차저차 공적인 사무 때문에 사진을 찍겠다는 뻔한 거짓말을 하고, 또 거기에 속아넘어가(?) 주신 덕으로 ‘금지’된 길로의 여정이 시작될 수 있었다. (혹 이 글을 읽으시는 분 중에 ‘나는 왜 안돼?’ 라는 마음으로 관리사무소에 무리한 요구를 하지 마시길… 여러 사람이 피곤해질 뿐만 아니라 지도에 표시된 등산로가 훨씬 전망이 좋고, 가벼운 산타기 맛이 제대로 납니다.)
등산로 초입에서 어서 들어오라 반기는 아담한 오솔길과 제승당 일대에 널리 퍼져있는 홍송
길가에 군락을 이룬 시릿대. 임진왜란 때 화살대의 주요 재료였던 시릿대는 한산도뿐만 아니라 한산도 앞 죽도, 미륵도 곳곳에 아직까지도 잘 자라고 있다.
습해진 기후 덕에 버섯들은 신났다.
아, 망산가는 산행은 여기서 끝이 났다. ㅜ.ㅜ 등산로 표지가 없는 까닭에 계속 나타나는 갈림길에서 복불복 게임을 하듯 선택 또 선택해서 걸어온 길이 마을로 이어지며 산행의 기분은 급 추락.(그러게 가지 말라는 길은 안 가는 게 대체로 이득인 듯…)
길가의 ‘10년 차 염소 부부’(둘이 있는 품새가 데면데면 하는 10년 차 부부인 것 같길래…)한테 길을 물어보랴, 뭐 표지가 없으면 사람이라도 있어야 물어보지. ㅡ.ㅡ;;;허무하지만 애초부터 안개 따라 나선 길이라 개의치 않고 걷는다. 걷다 보니 나선 목적도 바뀌고 이제 걷는 자체에서 즐거움이 느껴지니 감나무 밑에서 입 벌리고 있다 감 얻어먹은 격이다.
언젠가 차를 몰고 한산도 해안로가 아닌 섬 안길을 이리저리 다닌 적이 있는데 한참을 돌아와야 닿을 수 있었던 의항, 대촌 등의 마을이 산을 넘어 오니 의외로 금방이다.
저기 안개가 걸쳐 있는 곳이 망산 아랫자락이렷다. 그러나 대촌, 의항 두 마을을 걸어오며 이미 망산은 다음 기회로 미루어졌고, 마치 처음부터 걷기 위해 온 것인 양 들길을 걷는다.
천천히 걷자니 아하 차~암 좋다.
도랑을 흐르는 물소리가 그리 아리따운 화음을 지녔다는 걸 알았고, 산 속 어디서 들려오는 새소리가 그리 간절함을 알았고,
길에서 만난 해바라기와 접시꽃의 선명함이 생존경쟁의 치열함에서 온 것임을 알았고,
소가 하루 종일 씹고 있는 것이 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고,(이건 예전부터 알았지 참…)
수령이 120년 밖에(?) 안 되었다는 느티나무와 소나무가 형, 동생인양 같이 자랄 수도 있다는 신기한 사실도 알았다.
의항마을 서쪽 끝에서 본 바다.(그래도 섬인데 바다 사진 한 컷은 있어야지…)
의항(議項• 개미목)은 해안에 인접한 이 마을 지형이 잘룩한 모양새로 개미허리같다 하여 토박이지명으로 ‘개미목’으로 부르던 것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일설에는 한산해전에서 패해 달아나던 왜적들이 물길을 틔우기 위해 개미떼처럼 달라붙어 파놓은 산의 형상이 잘록한 개미허리모양이 된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한산대첩 이전에 이미 의항이란 지명이 사용되고 있었기에 이는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어쨌거나 그 잘록한 목은 바람이 지나는 길인 듯 안개가 많아 하늘과 바다가 구분이 잘 안되긴 해도 이 곳에 섰을 때 느껴지는 바람은 맑으나 흐리나 똑같이 시원하다.
그렇게 듣고 보고 느낀 것은 한산도 선착장에서 차 타고 20분 거리에 있는 서북쪽 농촌마을이 아니라 공기내음이 좋고 바람이 시원하며 길가의 꽃이 예쁘고, 작지만 의미 있는 소리들이 있는 ‘안개 자욱했던 의항마을’로 마음 안에 기억될 것이다.
한국의 정체성을 담고 있는 말 가운데 ‘빨리빨리’ 만큼 세계인들이 많이 알고 있는 말도 드물 것이다. 빠른 것을 추구하는 문화 속에서 느린 것 또는 천천히 가는 것은 자칫 비정상적인 것이나 경쟁에서 뒤쳐진 것이라 비쳐지기 쉽지만 막상 천천히 가기란 그리 쉽지 않다. 자동차 속도계의 시속 몇 km 속도감은 한걸음 한걸음이 주는 단단한 무게감에 비해 너무도 편하기 때문이다.
빠르기 때문에 놓치고 마는 것들을 생각해본 적이 있었던가? 천천히 가보지 않으면 알 수 없기에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제주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을 필두로 곳곳에 천천히 걷기를 위한 길들이 생기는 것은 빠르기 때문에 놓치고 마는 것들을 생각해보고자 하는 사람들의 바램을 보여 주는 것일 게다.
구름과 안개를 따라 나섰다가 얼결에 천천히 걷기가 되어버린 주말 오후의 일탈이 오래도록 마음 한 켠에 남을 것 같다.
천천히 걷기
적어도 걷는 순간만큼은
'강 같은 평화'가 찾아들었다.
걷기는 마음의 상처를 싸매는 붕대,
가슴에 흐르는 피를 멈추는 지혈대 노릇을 했다.
자연이 주는 위로와 평화는 훨씬 따뜻하고 깊었다.
보이지 않던 꽃들이, 눈에 띄지 않던 풀들이,
들리지 않던 새소리가 천천히 걷는 동안에
어느 순간 마음에 와 닿았다.
ㅡ 서명숙의 [놀멍 쉬멍 걸으멍 제주 걷기여행] 중에서
ㅇ 한산도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