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소개
‘토영 이야~길’은 통영의 문화, 예술, 역사를 품은 언덕과 골목을 따라 걷는 도보코스입니다. 항구를 따라 걷는 ‘예술의 향기길’에서는 복원된 거북선을 시작으로, 세계 조각가들의 작품과 조용한 앞바다 풍경이 어우러진 남망산을 지나 동피랑 벽화마을로 이어집니다. 조용한 골목 안에는 김춘수 시인의 생가와 나폴리 모텔 등 문학과 영화의 흔적도 함께 남아 있습니다.
동피랑을 지나면 김용주 화백이 살았던 주전골과 청마 유치환의 생가, 청마거리를 따라 이어지는 문학의 길이 펼쳐집니다. 이곳에서는 청마의 대표작이 된 ‘행복’이나 ‘우편국에서’의 배경이 된 실제 우체국을 만날 수 있으며, 그가 수천 통의 편지를 부친 사랑의 흔적도 엿볼 수 있습니다. 오래된 서점과 찻집, 골목마다 남겨진 문학적 흔적들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청마거리를 지나면 통제영의 중심인 세병관과 운주당으로 이어집니다. 삼도수군통제사들이 집무를 보던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형 목조건물로, 그 역사적 가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세병관 뒤편 언덕길에는 통제사 비석과 운주당이 자리하며, 이곳에서는 통영시가지와 한산도, 한려수도의 바닷길까지 조망할 수 있습니다.
세병관의 황토담을 따라 나서면 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배경이 되었던 간창골이 나타납니다. 돌담이 이어지는 골목길과 우물, 푸른 이끼가 낀 담벼락은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합니다. 서문고개에 이르면 소설 속 인물들이 지나던 길이자, 박경리가 어린 시절 뛰놀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골목 끝에는 뚝지먼당과 박경리의 시비, 명정골과 충렬사까지 이어지는 길이 기다립니다.
언덕과 골목을 오르내리는 이 코스는 단순한 걷기가 아닌 통영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을 느끼는 여정입니다. 예술가들의 흔적과 문학의 풍경, 역사 속 유적지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며, 코스를 마무리할 즈음에는 동피랑이나 세병관 언덕에서 통영 바다의 아름다움을 파노라마처럼 감상할 수 있습니다. 통영의 문화적 깊이와 풍경이 어우러진 이 코스는 걷는 것만으로도 감동을 전해줍니다.
통영이 품은 시인의 유년 기억 김춘수 시인의 시비가 자리한 남망산 입구의 쌈지 터는, 시인의 유년 시절 추억이 깃든 고향의 공간입니다. 시비가 처음 설치된 장소는 항남동 간선도로변이었으나, 남망산으로 오르는 초입으로 옮겨져 이제는 시인이 바라보던 바다, 들리던 갈매기 소리, 머물던 배들이 보이는 그 풍경 안에 존재합니다. 시인의 생가에서 엎드리면 닿을 거리, 그가 아침마다 처음 마주했을 푸른 물빛과 파도소리가 여전한 이곳은 시가 태어난 감성의 원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국민이 사랑한 ‘꽃’의 시비 ‘꽃’은 김춘수 시인의 대표작이자, 국내 시인들이 가장 애송하는 시로 손꼽히는 작품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첫 구절로 시작해 ‘그는 나에게로 와서 하나의 꽃이 되었다’는 표현은 인간 존재의 의미와 관계의 아름다움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이 시는 시인과 대중 모두에게 오랫동안 사랑받으며 수많은 낭송회와 행사에서 빠지지 않는 단골 레퍼토리가 되었습니다. 통영에서는 이 감동을 직접 마주할 수 있도록 ‘꽃’ 전문이 새겨진 시비를 세웠으며, 김춘수 시인의 자필 글씨로 새긴 점도 의미를 더합니다. 시비 건립에 함께한 시민의 마음 ‘꽃’ 시비는 통영시 예산이 아닌 시민 주도 모금으로 세워졌습니다. ‘꽃과 향기’라는 시민단체와 지역 신문사의 주도로 ‘꽃 한 송이’라는 모금운동이 펼쳐졌고, 초등학생부터 어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이 참여했습니다. 시비 뒷면에는 모금에 참여한 이들의 이름이 동판에 새겨졌으며, 이 시비를 바라보며 쓰다듬는 이들 중 다수는 시비 건립에 함께한 시민일 것입니다. 이는 한 편의 시가 공동체 속에서 얼마나 깊은 정서적 울림을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사례입니다. ‘꽃’이 태어난 기억의 조각들 김춘수 시인은 시 ‘꽃’의 시상 배경으로 유년기의 강렬한 인상들을 언급했습니다. 통영 장개섬의 바다, 새들을 갈매기라 착각했던 동심, 어머니와 함께한 저녁놀의 풍경, 봉선화가 피어있던 담장 아래의 추억 등이 한 겹 한 겹 쌓여 ‘꽃’이라는 시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의 시는 단순한 문학적 형상이 아닌, 개인의 체험과 감정, 그리고 고향이라는 정서적 기반에서 태어난 살아 있는 언어입니다. 여행 TIP 김춘수 시비는 남망산공원 입구 쌈지 터에 위치해 있으며, 시인의 생가와 도보로 이동 가능한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시비 앞에서는 바다와 갈매기, 정박한 배들이 어우러진 시인의 기억 속 풍경을 그대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남망산공원은 디피랑 야간 디지털 테마파크와도 인접해 있어, 낮에는 시비와 문학 산책을, 밤에는 빛의 산책을 함께 즐길 수 있습니다. 시비 뒤편의 동판에서 자신의 이름이나 지인을 찾아보는 소소한 재미도 경험해 보세요. 모금 참여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통영 도심 속 복합 문화공원 남망산 조각공원은 경상남도 통영시 동호동에 위치한 도심형 공원으로, 충무공원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립니다. 해발 72m의 낮은 구릉지에 조성되어 있으며, 시민들의 휴식 공간이자 문화예술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공원 내에는 체육시설과 산책로, 정자, 조형물 등이 함께 조성되어 있습니다. 공원 내 주요 시설과 경관 공원 중심에는 이순신 장군 동상과 한산대첩비가 있으며, 수향정(2층 팔각정자)과 열무정 같은 쉼터 공간도 함께 배치되어 있습니다. 벚나무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산책길을 따라 이동하면 남동쪽으로 거북등대, 한산도, 해갑도, 죽도 등 한려수도의 경관을 조망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 함께 통영의 역사적, 지리적 특징을 관람할 수 있는 장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대조각 전시 공간 남망산 조각공원은 1997년 10월 개장하여 세계 10개국 15명의 현대조각가 작품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야외에 설치된 조형물은 조각가들의 다양한 조형 언어를 직접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현대예술에 대한 시민의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조각작품은 남망산 정상 주변을 중심으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문화시설과 전통 공간 공원에는 통영시민문화회관, 오광대 놀이마당, 청마 유치환 시비, 김상옥 시비 등 문화시설이 함께 위치하고 있어 예술과 문학을 접할 수 있는 공간으로도 활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공원 기슭에는 조선시대 한산무과 시험이 열렸던 활터가 남아 있으며, 인근에는 나전칠기공예 전수회관도 있어 통영의 전통 공예문화 계승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여행 TIP 벚꽃이 피는 봄철에는 산책로 주변이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어 방문객이 많습니다. 문화회관과 시비는 공원 내에서 도보 이동이 가능하며, 주요 시설은 무료로 개방되어 있습니다. 조각작품은 야외에 전시되어 있으므로 기상에 따라 관람 환경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한산대첩의 바다를 배경으로 선 시비 탁 트인 통영 남망산 조각공원 한켠, 일제강점기 경찰서장의 관사가 있었던 자리에 지금은 시인 김상옥의 대표작 '봉선화' 시비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곳은 1997년 조성된 남망산야외조각공원으로, 겨울이면 핏빛 동백꽃과 아름드리 해송이 어우러지는 경관 속에서 시비를 만날 수 있습니다. 갈림길에 세워진 표지판을 따라가면 쉽게 도착할 수 있는 이 시비는, 통영과 김상옥 시인의 깊은 인연을 상징하는 문화적 장소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시조 ‘봉선화’에 담긴 정서 ‘봉선화’ 시조는 단출한 시어 속에 한국인의 전통적 정서를 절묘하게 녹여낸 작품입니다. 비, 장독간, 손톱, 누님, 꽃물, 실 등의 소박한 소재는 그 자체로 시인의 유년기 기억과 가족애, 그리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상징합니다. 특히 어린 시절 누님의 손에 꽃물을 들이던 기억은 따뜻한 감성과 함께 독자의 마음을 울리는 정서를 자아냅니다. 시비의 탄생 배경 이 시는 시인이 1936년 독서회사건으로 통영경찰서에 투옥되었을 당시 면회를 온 누님의 애틋한 정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후 초정은 누님이 살고 있는 함경북도 청진으로 향하게 되고, 생전 처음 겪는 혹독한 추위와 낯선 환경 속에서 고향 통영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지며 ‘봉선화’가 태어나게 됩니다. 시 속의 정서는 누님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고향에 대한 향수로 가득합니다. 초정 김상옥의 문학 세계 김상옥은 1920년 통영에서 태어나 1938년 『문장』을 통해 등단했습니다. 『봉선화』 외에도 『초적』, 『고원의 곡』, 『목석의 노래』 등 다수의 시조집을 남긴 그는 평생 시조의 서정과 미학을 탐구한 대표적 시인이었습니다. 2007년 3월 시비 제막식에는 이어령, 김남조, 이근배, 허영자, 김성우 등 전국의 주요 문인들이 참여해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렸습니다. 봉선화 시비의 의미 이 시비는 경상남도의 지원과 통영시의 주도로 세워졌으며, 통영 문학정신을 상징하는 주요 명소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조용히 시비 앞에 서면, 그 속에 담긴 고향의 향기와 누님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 전해지는 듯합니다. 시비가 놓인 자리에서 바라보는 한산대첩의 바다 또한 시의 울림을 더욱 깊이 있게 합니다. 여행 TIP 남망산공원 내 조각공원을 따라 산책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시비를 만날 수 있어요. 봉선화가 피는 계절에 방문하면 시의 정서를 더 깊이 느낄 수 있습니다. 김상옥 시인의 문학을 알고 방문하면 감동이 배가됩니다.
영화의 고향, 남망산 시민문화회관 남망산 시민문화회관 분수대 인근에는 ‘영화의 고향’이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곳은 1963년 영화 「김약국의 딸들」의 촬영지로, 박경리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의 주요 장면이 통영에서 촬영되었음을 기념하는 장소입니다. 당시 유한철이 각색하고 유현목이 감독을 맡았으며, 김동원, 황정순, 엄앵란, 최지희 등이 출연했습니다. 실제 촬영지에서 생생했던 반응 당시 촬영현장에는 많은 인파가 몰려 큰 혼잡을 이루었고, 관객들은 극 중 갈등 장면에 격한 반응을 보였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특히 용란과 머슴 한돌 사이의 장면이나 한실댁의 죽음 장면에서는 관람객들이 격앙된 목소리로 욕을 퍼붓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영화의 제작과 수상 기록 「김약국의 딸들」은 1963년 극동흥업에서 제작한 108분 분량의 흑백 영화로, 제3회 대종상 여우조연상(최지희), 촬영상(변인진), 음악상(김성태), 미술상(이봉선) 등을 수상했으며, 청룡상과 부일영화상, 아시아 영화제 등에서도 여러 부문에서 수상했습니다. 이후 2005년 MBC 소설극장에서 드라마로 재구성되어 방영되기도 했습니다. 여행 TIP 남망산 시민문화회관 분수대 근처에서 ‘김약국의 딸들’ 영화 촬영지를 기념하는 ‘영화의 고향’ 표지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곳은 영화 주요 장면의 실제 촬영지로, 박경리 소설 속 배경과 통영의 옛 모습을 함께 떠올릴 수 있는 장소입니다.
김춘수의 유년과 여황산의 기억 김춘수 시인은 통영의 여황산 자락에 위치한 초등학교에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여황산은 그가 자주 오르내리던 공간으로, 붉은 벽돌집과 샛노란 죽도화가 피던 풍경은 이후 그의 시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교우지에 실린 글로 문재를 인정받았고, 시를 쓰기 전부터 자연과 고향에 대한 관찰과 애정이 문학적 토양으로 자리 잡았음을 그는 직접 밝히고 있습니다. 일본 유학 중 겪은 감옥생활 김춘수는 일본 유학 시절 노동 현장에서 한국인 고학생들과 어울리며 시국 이야기를 나눈 것이 빌미가 되어 요코하마 헌병대에 연행되어 보름간 수감 생활을 겪습니다. 그는 고문과 추위 속에서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을 시인하게 된 경험을 수치로 여기며, 이 시기를 ‘씻기 어려운 모욕’으로 회고했습니다. 이를 통해 시인은 현실의 억압과 내면의 고통을 날 것 그대로 마주했던 젊은 시절을 직접 증언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회고 속에 살아 있는 고향 김춘수는 고향 통영과 여황산을 단순한 배경이 아닌 문학적 자양분으로 회상합니다. 자연스럽게 고향과 가족을 사랑하라는 스승의 말, 어린 시절 보았던 풍경은 『왜 나는 시인인가』라는 에세이 속에 구체적인 기억으로 되살아납니다. 고향은 그에게 단순한 출생지가 아니라 문학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여행 TIP 김춘수 시인의 유년 시절 기억이 서린 여황산은 통영 북쪽에 위치한 산으로, 그 자락에는 현재도 학교와 주택가가 있어 에세이에 언급된 풍경 일부를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왜 나는 시인인가』에 등장하는 여황산, 탱자나무 울타리, 선교사 붉은 벽돌집 등은 실제 지형이나 주변 장소와 비교하며 문학기행의 감상 포인트로 삼을 수 있습니다.
담벼락에 펼쳐진 예술 골목 동피랑벽화골목은 통영시 중앙동 언덕 위에 위치한 마을로, 구불구불한 오르막 골목길을 따라 담벼락마다 다양한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주민들의 마을이자 예술 공간인 이곳은 벽화 공모를 통해 지속적으로 갱신되며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매년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습니다. 골목 사이사이마다 특색 있는 벽화와 아기자기한 소품이 조화를 이루며, 사진 촬영지로도 인기가 많습니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통영의 야경 동피랑 마을의 정상에는 ‘동포루’가 위치해 있으며, 이곳에서는 강구안을 비롯한 통영항의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습니다. 낮에는 활기찬 관광객들로 붐비는 이곳이지만, 해가 지고 난 후에는 한적한 야경 명소로 탈바꿈하여 통영의 고즈넉한 밤바다와 불빛을 감상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입니다. 저녁이후로 상점과 카페는 운영을 마치지만, 조용한 마을 산책과 함께 야경을 즐기시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주민과 함께하는 조용한 여행지 동피랑은 관광지이자 실제 주민들이 거주하는 생활 공간입니다. 특히 야간에는 정숙이 요구되므로 큰 소리나 소란스러운 행동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벽화를 감상하며 걷는 동안 마을의 고요함과 예술이 함께 어우러지는 특별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방문객 여러분의 배려가 동피랑의 아름다움을 지켜주는 소중한 힘이 됩니다. 여행 TIP 동포루 전망대는 일몰 직후 방문하시면 아름다운 강구안의 야경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야간에는 주민 생활을 배려해 조용히 이동해 주세요. 야간 관광 및 문화행사 정보는 통영 야간관광 인스타그램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청마 유치환이 태어난 곳 시인 청마 유치환은 1908년 7월 14일, 통영시 태평동 552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유준수는 한의사였고, 어머니 박우수는 예술적인 기질을 지닌 분으로 5남 3녀 중 차남으로 유치환을 낳았습니다. 생가는 도로 확장으로 철거되어 현재는 ‘통영누비’라는 상점이 있고, 맞은편에는 ‘영수당한의원’이 있습니다. 생가의 원형은 청마문학관에서 복원되어 전시 중입니다. 출생지를 둘러싼 논란과 판결 청마의 고향을 두고 통영과 거제 간에 논란이 있었으며, 유족 측은 청마의 출생지가 거제라고 주장하며 관련 표기 삭제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청마 스스로 시 해설집 『구름에 그린다』와 수필집 『나는 고독하지 않다』 등을 통해 자신의 출생지를 통영으로 명확히 밝혔고, 대법원은 유족의 주장을 기각하며 법적으로도 통영이 출생지임을 인정하였습니다. 청마가 남긴 고향에 대한 증언 청마는 자신의 글에서 ‘통영(지금의 충무시)’을 출생지로 표현하고 있으며, 어머니의 산소가 있는 거제 둔덕을 ‘고향서도 바다 건너 있는 곳’이라 말합니다. 이는 생활의 중심이 통영이었음을 나타내는 기록으로 평가됩니다. 형 유치진 또한 수필과 방송에서 자신이 통영에서 태어났다고 밝혔습니다. 거제와 통영, 그리고 유족의 선택 청마의 아버지 유준수는 거제 둔덕 출신이었고, 결혼 후 처가인 통영에서 한의업을 이어갔습니다. 유족이 거제에 유품을 많이 기증한 배경에는, 거제시의 적극적인 기념사업 추진에 대한 감사의 뜻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통영에서는 문화적 논란으로 유족의 감정이 상한 측면도 있었습니다. 여행 TIP 청마의 생가터는 통영시 태평동 552번지 일대이며, 현재는 상점과 도로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청마문학관에서는 생가의 원형이 복원되어 있으며, 그의 작품 세계와 생애를 소개하는 다양한 전시물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통영이 낳은 최초의 서양화가 김용주는 1910년 10월 14일 통영시 태평동 617번지에서 태어났으며, 한말 인동도호부사를 지낸 김진현의 증손입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할머니의 보살핌 속에 유복하게 자랐습니다. 1926년 통영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동경 메이지학원 중학부를 수료하고 카와바타 미술학교 양화부에 입학, 1934년 졸업했습니다. 이후 인체 연구를 중심으로 6년간 표현 기법을 탐구하며 서양화에 대한 이해를 넓혔습니다. 예술과 사람, 두 세계를 잇다 귀향 후 그는 항남동에 화실을 열고 창작 활동을 이어갔으며, 통영 지역 예술인들과 교류하며 문화 중심 인물로 자리잡았습니다. 유치환, 장응두, 정찬진 등 다양한 예술가들이 그의 화실을 드나들었고, 사람 좋은 성품과 유머 감각으로 널리 사랑받았습니다. 1940년 조선미술전람회에 , 이 입선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후진 양성에 힘쓰며 통영 미술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이중섭과의 인연, 그리고 마지막까지의 작품 활동 1953년, 피난 온 이중섭이 산양면 김용주의 집에서 머물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고, 이후 성림다방 개인전을 함께 준비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김용주는 데생을 중시하며 예술의 진실성을 강조한 화가였고, 누드와 인물화를 즐겨 그렸습니다. 병을 얻은 이후에도 꾸준히 창작을 이어가던 그는 1959년 1월 15일 부산에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예술가로서의 유산 김용주는 생전 약 300여 점의 작품을 남겼으며, 일부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의 고향인 통영에는 남아 있는 작품이 많지 않아 아쉬움을 남깁니다. 그의 생가 인근에는 현재 '모아넷'이라는 상호가 있는 건물이 있으며, 건물 앞에는 김용주가 살았던 곳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여행 TIP 김용주가 살았던 곳은 중앙동사무소 맞은편 골목을 따라 올라가면 위치해 있으며, 현장에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김용주가 활동했던 항남동 일대는 이중섭, 유치환 등 다양한 예술인들의 흔적이 남아 있어 통영 예술 산책 코스로도 적합합니다.
형제의 삶이 깃든 기념공간 통영시 태평동 주전3길 18에 위치한 김용식·김용익 생가는 형제가 태어나고 자란 가옥을 개보수하여 기념관으로 조성한 공간입니다. 2013년 4월 17일 개관하였으며, 김용식 전 외무부장관의 장남 김수환 목사 부부가 통영시에 기부채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부지면적 356㎡의 이 기념관은 한 집안에서 태어난 외교관과 작가를 함께 기리는 국내에서도 보기 드문 사례로, 통영의 문화예술사적 의미를 보여주는 장소입니다. 대한민국 외교의 길을 연 김용식 1913년생인 김용식은 유창한 외국어 실력과 단정한 태도로 외교 무대에서 ‘신사 외교관’으로 불렸습니다. 신생 대한민국의 외교적 대변자 역할을 자처했으며, 외교관으로서의 삶 외에도 동생 김용익의 문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을 보였습니다. 그는 동생이 문학으로 더 오래 기억될 것이라 예견할 정도로 그 업적을 존중했습니다. 영문학으로 세계를 울린 김용익 1920년생 김용익은 통영초등학교와 중앙중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동경 아오야마학원 영문과를 나왔으며, 1948년 미국 유학 후 소설창작을 전공하였습니다. ‘꽃신’, ‘겨울의 사랑’, ‘푸른 씨앗’ 등은 미국과 유럽에서 출판되며 인정받았고, ‘꽃신’은 세계 19개국에서 소개되며 노벨문학상 후보로까지 거론된 바 있습니다. 그는 작가로서 문학성과 언어적 감수성 모두를 인정받은 인물입니다. 곧은 성품과 검소한 삶 김용익은 삶의 모든 면에서 원칙을 고수한 인물로, 교수로 재직 중에도 학문적 공정성을 철저히 지켰던 일화들이 전해집니다. 자동차나 시계 없이 살았고, 신문이나 TV를 보지 않으며 글쓰기에 전념했습니다. 그의 글은 문체의 예술성과 함께 인간에 대한 신뢰를 담고 있어 해외 평론가들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문학과 외교를 기리는 공간 기념관에는 김용식의 외교 활동을 기리는 자료와 김용익의 주요 작품 관련 전시가 마련되어 있으며, 형제가 걸어온 각기 다른 삶의 궤적을 한 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 생가 공간은 통영 예술정신의 깊이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소로서 의미를 더하고 있습니다. 여행 TIP 김용식·김용익 기념관은 형제가 태어나고 자란 통영시 태평동 주전3길 18, 옛 생가를 리모델링하여 조성되었습니다. 기념관은 2013년 4월 17일 개관되었으며, 김용식 전 외무부장관의 장남 김수환 목사 부부가 생가를 통영시에 기부채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 수군의 전략 본부, 통제영 삼도수군통제영은 조선시대 경상·전라·충청 삼도 수군을 총괄하던 수군 본영으로, 1604년 설치되어 1895년까지 무려 292년간 해양 방위의 중추 역할을 했습니다. 최초의 통제영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통제사로 한산도에 설치한 진영에서 시작되었으며, 현재의 통영에 위치한 삼도수군통제영은 제6대 통제사 이경준에 의해 설영되었습니다. ‘통제사’는 육군의 병조판서에 버금가는 고위직으로, 이곳은 당시 조선 수군의 작전과 행정의 중심이었습니다. 세병관과 통영 12공방 통제영의 핵심 공간인 ‘세병관’은 조선시대 목조건축물 중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와 위용을 자랑하며,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통제사의 공식 행사가 열리던 장소로, 오늘날에도 역사적 상징성과 건축미로 많은 이들을 매료시키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구성인 ‘통영 12공방’은 수군의 필요에 따라 다양한 공예품과 무기를 제작하던 지역 최대의 공방 체계로, 통영의 전통 수공예 명맥을 이어온 뿌리입니다. 야경으로 다시 살아난 역사 2021년, 야간 경관조명 설치 사업이 완료되면서 삼도수군통제영은 또 다른 얼굴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내부 출입은 일몰 전까지만 가능하지만, 외부에서 바라보는 통제영의 모습은 조명과 어우러져 한층 웅장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특히 국보 세병관에 비추어진 조명은 고즈넉한 밤 통영의 역사를 더욱 깊이 있게 체험할 수 있는 명장면을 연출합니다. 낮과는 전혀 다른 매력을 품은 야간 관광지로서도 주목받고 있습니다. 여행 TIP 통제영 내부는 일몰 전까지만 개방되므로 오후 늦게 도착한다면 외부에서 야경 감상만 가능합니다. 야간 경관조명은 사진 촬영에 적합하므로 삼각대 지참 시 더욱 아름다운 장면을 담을 수 있습니다. 주변에 동피랑 벽화마을, 중앙시장 등 다른 명소들이 인접해 있어 반나절 코스로 알차게 즐길 수 있습니다. 역사적 의미를 더 알고 싶다면 해설사 안내 시간에 맞춰 방문해보세요. 통제영 관련 야간 행사 및 축제 일정은 통영시 공식 인스타그램 tonight.tongyeong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병관 길목에서 만나는 벅수 통영시 문화동, 세병관으로 오르는 도로 오른쪽에 위치한 이 벅수는 돌로 만든 장승(石長丞)으로, 통영 방언으로 장승을 ‘벅수’라고 부릅니다. 벅수는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마을 입구나 길가에 세워 수호신, 경계표지, 이정표의 역할을 해왔습니다. 유일한 남성 벅수, 토지대장군 문화동 벅수는 일반적인 남녀 한 쌍의 장승과 달리, 남성 하나만 세워진 독벅수 형태입니다. 몸 앞에는 ‘土地大將軍(토지대장군)’이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으며, 등 뒤에는 ‘光武十年八月 同樂洞 立’, 즉 1906년 8월 동락동에서 세웠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습니다. 풍수와 신앙이 만난 비보장승 이 벅수는 당시 동락동 주민들이 풍수지리설에 따라 동남쪽 방향이 허하다는 판단 아래, 허함을 보완하고 진압하기 위해 세운 비보장승입니다. 단순한 상징물을 넘어 마을의 수호와 벽사(辟邪), 축귀(逐鬼), 방재(防災), 진경(進慶)의 기원이 담긴 신앙적 조형물입니다. 험상궂지만 따뜻한 미소 벅수의 얼굴은 험상궂으면서도 미소를 머금은 독특한 표정을 하고 있어 민간 조형물로서의 미적 가치도 높습니다. 보기 드문 독벅수로서 통영 지역의 민속자료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여행 TIP 문화동 벅수는 세병관 진입로 오른편에 위치해 있어 세병관 방문 시 함께 둘러보시기 좋습니다. 벅수에 새겨진 음각 문자와 조형미는 가까이에서 직접 관찰하시면 더욱 생생하게 느끼실 수 있습니다. 풍수지리와 민간신앙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께 흥미로운 문화유산 체험이 될 것입니다.
간창골에 남은 오래된 우물 간창골 우물은 통영시 문화동, 옛 통영청년단회관(현 통영문화원) 아래 일대에 위치해 있으며, 이 지역은 과거 '간창골'이라 불렸습니다. 이 우물은 통제영시대 9정(九井) 중 하나로 기록된 ‘서구상로변정(西舊上路邊井)’에 해당하며, 관청골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던 식수원이었습니다. 한때 ‘간창골 샘’이라 불리며 마을의 중요한 생활 시설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일상의 중심이었던 공동우물 상수도 보급 이전까지 간창골 우물은 주변 주민들의 주요 식수원으로 사용되었으며, 특히 아낙네들이 모여 물을 긷고 이야기를 나누던 생활공간이었습니다. 지금은 사용되지 않고 있으나, 당시에는 소통과 생활의 중심지로 기능하며 마을 공동체의 일부를 이루었습니다. 박경리 소설 속의 간창골 박경리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에서는 간창골이 주요 배경으로 등장하며, 이 우물은 작품 속 인물들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된 공간으로 묘사됩니다. 우물가에 모인 이웃들이 김약국의 딸들에 대한 소문을 나누는 장면은 당시 사람들의 생활과 정서를 실감 나게 보여줍니다. 소설을 통해 간창골 우물은 문학적으로도 의미 있는 장소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여행 TIP 현재 우물은 사용되지 않지만, 통제영 시대의 9정 중 하나로 지역 생활사와 문학을 함께 돌아볼 수 있는 장소입니다. 박경리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 속 장면을 미리 읽고 방문하면, 우물과 주변 공간이 문학적으로 더 깊이 다가옵니다.
통영 항일운동의 거점 공간 일제강점기에 건립된 옛 통영청년단회관은 3.1운동 기념관이자 청년단 활동의 중심 공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통영 청년단은 1919년 창단 이후 1931년 강제 해산될 때까지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항일 지하운동을 이어온 조직이었습니다. 현재 이 건물은 통영문화원과 충무고등공민학교의 건물로 활용되고 있으며, 근대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통영 청년단의 창립과 성장 1919년 3.1운동 이후 통영의 청년들은 단순한 시위에서 벗어나 체계적인 독립운동이 필요하다는 자각을 바탕으로 박봉삼, 임철규, 이영재 등 지역 인사들이 모여 같은 해 7월 21일, 통영 청년단을 창단하였습니다. 박봉삼은 초대 단장으로 선출되었고, 341명의 회원이 뜻을 모았습니다. 이후 청년단은 독립운동뿐 아니라 교육과 계몽 활동에도 집중하며 민족정신 고취에 힘썼습니다. 청년단회관 건립의 경과 청년단은 독립적 활동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회관 건립을 추진하였고, 이영재가 대화정의 부지를 기부하며 시작됩니다. 자금 부족과 일제의 방해 속에서도 유학생 출신 단원들이 북과 나팔을 울리며 모금 운동을 이어갔고, 임철규 단장은 자신의 재산과 문중 전답을 처분해 건축비를 마련했습니다. 그렇게 총공사비 1만 4천 원, 연건평 120평의 벽돌 2층 양옥 건물인 통영 청년단회관이 4년여에 걸쳐 1923년 11월 18일 완공되었습니다. 이 회관은 당대 통영군민에게 큰 의미의 상징물이 되었고, 준공식은 동아일보에도 크게 보도되었습니다. 계몽과 민족의식을 위한 활동 청년단은 ‘지육부’를 중심으로 체계적인 교육 활동을 벌였습니다. 강세제, 김한기 등 강사들이 강습을 진행하였고, 수강생이 몰려 주야간으로 나뉘어 운영되었습니다. 강연 주제는 ‘아는 것이 힘이다. 우리도 배우자.’, ‘공중도덕을 지키자’ 등 계몽적 내용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항일 자주 의식을 고취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경찰은 고등계 형사를 배치해 감시했고, 강연이 민족의식으로 흐르면 중지 명령과 연행이 뒤따랐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1930년대 초까지 이어졌습니다. 조선물산장려운동과 청년단의 사회 참여 청년단은 1923년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된 ‘조선물산장려운동’에도 적극 동참하여 ‘내 것, 조선 것, 우리 것’을 강조하며 국산품 애용을 장려했습니다. 강연회와 시가행진을 통해 주민 참여를 이끌었으며, 민족주의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사회의 신뢰를 받는 조직으로 기능했습니다. 이러한 활동들은 단순한 항일 조직을 넘어 오늘날 시민단체에 가까운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여행 TIP 옛 통영청년단회관은 현재 통영문화원 건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회관 건립에 참여한 주요 인물들의 이름과 기여 내용은 준공비에 새겨져 있어 현장 방문 시 참고할 수 있습니다. 통영청년단의 계몽 강연 주제나 활동 내역은 당시 시대 상황과 독립운동의 민간 흐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통영성을 지나던 경계의 고개 서문고개는 문화동과 명정동을 가르는 고갯마루로, 과거 통영성의 서문이 있던 곳에서 유래해 ‘서문고개’ 또는 ‘서문까꾸막’이라 불립니다. 문화동 간창골에서 충렬사나 명정샘으로 향하려면 반드시 이 고개를 넘어야 했으며, 폭이 좁아 마주 오는 사람 중 한 명은 비켜 서야 할 정도로 협소한 길이었습니다. 현재는 일부 구간이 통영문화원 옆을 관통하는 2차선 도로로 확장되어 원형이 훼손되었지만, 나머지 구간은 옛 모습 그대로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박경리 소설의 주요 배경지 소설가 박경리의 작품 속에서 서문고개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중요한 공간입니다. 『김약국의 딸들』에서는 주요 사건이 이 고개를 오르내리며 전개되고, 『토지』에서도 이 고개는 배경의 하나로 자주 등장합니다. 박경리에게 서문고개는 단지 이야기 속 배경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의 현장이기도 했습니다. 박경리의 유년 시절이 남은 공간 박경리는 서문고개 안쪽의 후미진 집에서 태어나, 단출한 살림을 꾸리던 어머니와 함께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집을 떠나 새살림을 차렸고, 박경리는 어머니와 단둘이 이 고개에서 살아가며 책을 손에서 놓지 않던 소녀로 자랐습니다. 당시 그녀는 세병관 인근 초등학교에 다니기 위해 하루에도 여러 번 이 고개를 넘었으며, 이후 시집을 갔다가 남편과 사별한 뒤에도 고향 서문고개는 그녀의 삶의 배경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시인 백석의 발걸음도 스친 길 서문고개는 소설뿐 아니라 시에도 등장하는 길입니다. 시인 백석은 사랑했던 여성 ‘난’을 만나기 위해 이 고개를 넘어 명정골로 향했다고 전해지며, 그 시적 정서 역시 서문고개의 풍경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여행 TIP 서문고개는 문화동과 명정동을 잇는 고갯길로, 충렬사와 명정샘 등 인근 장소들과 가까워 함께 방문하기에 좋습니다. 서문고개 주변에는 박경리 생가와 『김약국의 딸들』의 표지석이 위치해 있어, 작가의 유년기 배경을 현장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장소이므로, 『김약국의 딸들』 또는 『토지』의 해당 구절을 참고하면 이해와 감상이 깊어집니다.
충렬1길 골목 끝, 박경리 생가 통영시 충렬1길 76-34, ‘서문고개’에서 뚝지먼당으로 향하는 길목에 박경리 작가의 생가가 있습니다. 이곳은 명정동과 문화동을 가르는 고지대인 현재의 배수지 일대로, 과거 독사(纛祠)가 있던 언덕이었습니다. 이 ‘독’은 군영을 상징하는 깃발로, 그 터를 ‘뚝지먼당’, ‘쭉지먼댕이’ 등으로 불렀고, 지역 발음에 따라 둑사, 뚝사로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생가는 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무대인 서문고개 표지석에서 가까운 골목 안쪽에 있으며, 골목 끄트머리 오른편 건물이 박경리 작가가 태어난 집입니다. 시로 밝힌 출생의 이야기 박경리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 직접 쓴 시 「나의 출생」을 통해 상세히 밝히고 있습니다. 시는 1926년 음력 10월 28일, 가난했던 외가에서 태어난 배경과 태몽, 산통의 순간, 어린 부모의 모습까지 세세히 담고 있습니다. 특히 어머니의 태몽으로 용이 등장했으며, 실제 어머니의 이름이 '용수(龍守)'였다는 우연까지 더해져 시적 감흥을 줍니다. 이 시는 작가 개인의 가족사와 함께, 그녀가 삶을 어떻게 기억하고 문학으로 재현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소설과 시의 무대가 된 공간 박경리 생가 주변은 소설 『김약국의 딸들』, 『토지』 등 통영을 배경으로 한 작품의 무대이자, 시적 상상력의 근원이 된 장소입니다. 서문고개와 뚝지먼당 등은 실제로 박경리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작가의 문학과 현실이 교차하는 지점으로 평가됩니다. 이 생가는 단순한 출생지가 아니라 박경리 문학의 출발점이자 통영이라는 지역이 한국문학 속에 살아 숨 쉬는 장소입니다. 현재의 생가와 보존 현황 박경리 작가가 태어난 집은 외관상 일부 수리를 거친 흔적이 있으며, 현재는 다른 사람이 거주 중이라 내부 출입은 어렵습니다. 방문 시 외부에서 조용히 관람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생가 주변은 박경리 문학의 주요 배경지로 문학적 정서를 함께 느낄 수 있는 장소입니다. 여행 TIP 박경리 생가는 충렬1길 76-34에 위치해 있으며, 서문고개 표지석에서 가까운 골목 안쪽 오른편에 있습니다. 방문 전 박경리의 시 「나의 출생」을 읽고 가면 생가에 얽힌 가족사와 문학적 배경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현재는 일반 가정집으로 사용되고 있으므로 외부에서 조용히 관람하는 것을 권장합니다.
통영 서쪽 언덕 위의 누각 서포루는 과거 통영성(統營城)의 서쪽에 위치한 서피랑에 있던 포루로, 통영의 지형적 특성을 반영한 이름입니다. ‘서피랑’은 가파른 벼랑이 서쪽에 있다 하여 붙여진 명칭으로, 여황산 능선이 바다로 흘러내리다 솟아오른 언덕 지형을 뜻합니다. 이곳에 있었던 서포루는 일제강점기 때 철거되었으나, 이후 문화와 역사를 담은 교육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누각 1동(18㎡)과 성곽 53m가 복원되었습니다. 문학의 배경이 된 서피랑 일대 서포루가 있는 서피랑은 충렬사, 명정샘, 서문고개, 간창골, 세병관, 선창 일대를 아우르는 중심 공간입니다. 이 지역은 박경리의 소설 『토지』와 『김약국의 딸들』의 주요 무대이자 중심축으로 등장합니다. 특히 『토지』 제5부에서는 통영항의 밤 풍경을 묘사하는 장면이 인상 깊게 그려집니다. 지리산 산골에서 자란 인물 ‘몽치’가 통영항의 불빛과 활기를 처음 마주한 장면은, 정적인 산골과 대비되는 항구 도시 통영의 생동감을 보여줍니다. 기억 속의 장소, 야마골 소설 속에는 홍등가도 등장하는데, 이는 항구 도시 통영의 당시 모습을 반영한 공간입니다. 서피랑 부근에는 ‘야마골’이라 불리던 홍등가가 있었다고 전해지며, 지금은 사라진 옛 장소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항구와 맞닿은 도시에서 흔히 존재했던 공간 중 하나로, 통영의 과거 일상과 사회 환경을 보여주는 지역사적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백석의 시가 머문 언덕 서피랑 일대는 시인 백석이 사랑하던 여인 ‘난’(박경련)을 찾아 부지런히 오가던 길이기도 합니다. 백석은 충렬사 계단에 앉아 시를 쓰며 사랑의 열병을 앓았고, 서문고개, 명정샘, 변전소 등이 있던 그 길은 시적 창작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서포루와 그 주변은 단순한 역사 유적을 넘어, 시와 소설이 숨 쉬는 문학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여행 TIP 서포루는 서피랑 언덕 정상 부근에 복원된 누각으로, 인근에는 성곽 일부도 함께 복원되어 있어 조망과 산책을 겸한 방문이 가능합니다. 서포루 주변은 박경리의 『토지』, 백석의 「통영」 등 다양한 문학작품의 무대가 된 지역으로, 문학적 배경을 알고 보면 감상이 더욱 풍부해집니다.
두석장의 전통이 이어지는 집 명정골에 위치한 두석장 김덕룡의 집은 통영의 전통 금속 장식 기술인 장석, 즉 ‘두석’의 맥을 잇는 공간입니다. ‘두석’은 구리와 아연의 합금인 놋쇠(황동)로 만든 장식품을 말하며, 이를 가구에 부착하는 장인이 바로 ‘두석장’ 또는 ‘장석장’입니다. 김덕룡은 통제영 12공방 중 하나인 두석공방에서 장석을 제작했던 가문의 후손으로, 통영 장석의 3대 장인입니다. 통제영 12공방과 두석장의 역사 1604년 조선의 삼도수군 통제영이 통영에 자리 잡은 이후, 군수물자 조달을 위한 12공방이 설치되었습니다. 이 중 두석방은 가구의 금속 장식과 자물쇠를 제작하던 공방으로, 김덕룡 가문은 증조부 때부터 이 전통을 이어왔습니다. 김덕룡은 1916년생으로, 젊은 시절부터 장석 제작에 종사했으며 1996년 81세로 타계했습니다. 그의 아들 김극천은 군 제대 이후 1975년부터 본격적으로 전수를 받았으며, 200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64호 장석장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손끝에서 배운 장인의 길 김극천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잔심부름을 하며 자연스럽게 기술을 익혔다고 합니다. 그는 “천천히 야무지게 만들어라”는 부친의 가르침을 늘 마음에 새기며 장인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통영에는 “나무쟁이(소목장), 쇄쟁이(金屬匠)한테는 쑥 날 여가가 없다”는 속담이 전해지듯, 금속 장식 장인은 숙련된 기술과 인내를 필요로 하는 고된 일이었습니다. 김덕룡 역시 시대의 어려움 속에서도 가업을 지키며 장석을 만들어냈습니다. 작지만 정교한 전통 장석 장석은 가구의 부속품이지만 전체 디자인과 조형미를 완성하는 핵심 요소로, 장석 하나하나에 전통적 상징과 정교한 금속공예 기술이 담겨 있습니다. 나비, 태극, 박쥐, 학, 물고기, 십장생, 봉황 등 다양한 문양이 있으며, 자물쇠와 경첩 또한 실용성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갖춰야 했습니다. 장석은 대부분 수작업으로 제작되며, 그 종류는 2~3천 종에 이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나비장석’은 통영을 대표하는 명물로 평가받습니다. 기술과 예술이 만나는 장석 공예 장석 공예는 단순한 금속 세공을 넘어 기술과 예술이 결합된 전통문화입니다. 금속의 물성을 이해하고 가구와의 조화를 고려해야 하며, 문양과 리듬을 구현하는 미적 감각이 요구됩니다. 장석장은 기술자이자 예술가로, 전통 가구의 기능성과 미를 동시에 완성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처럼 명정골 두석장집은 오랜 시간 이어져 온 기술과 장인의 철학이 살아 있는 공간입니다. 여행 TIP 두석장 김덕룡의 집은 통영시 명정동, 공덕귀 여사의 생가 맞은편에 위치해 있으며, 12공방의 역사와 전통 장석 기술의 흐름을 현장에서 느껴볼 수 있습니다. ‘나비장석’ 등 통영을 대표하는 장석 문양은 전통 금속 공예의 섬세함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관련 전시나 기능보유자 작품을 관람하면 장인의 세계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장석의 실용성과 예술성, 그리고 전통공예로서의 문화적 가치를 알고 관람하면 가구 속 작은 부속품 하나까지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통영에서 태어난 영부인 공덕귀 여사(1911~1997)는 대한제국 군인이었던 공도빈과 방말선 사이에서 5녀 2남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가 태어난 통영의 집에는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영부인 공덕귀가 살았던 곳’이라는 표지석과 함께 ‘충렬4길 26’이라는 안내표시판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서른다섯 살에 홀로 된 어머니는 바느질로 자녀들을 키워냈고, 공덕귀 여사에게는 믿음 깊고 강직한 어머니로 기억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투옥되었고, 재건교회를 세워 장로로 평생을 헌신하였으며, 지역 여인들과 성경공부와 찬송을 함께하며 교류했습니다. 선교사의 꿈을 품은 청년 시절 공덕귀 여사는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유치원 조보모와 통영진명여학교 야간 교사를 하며 학업과 사회생활을 병행했습니다. 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인도 선교사를 꿈꾸던 그녀는 21세에 호주선교부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동래일신여학교에 입학합니다. 피아노와 수영에 능하고 ‘만가지 약장수’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다재다능했으며, 졸업식에서는 우등상, 도지사상, 4년 개근상을 모두 수상한 최우등생이었습니다. 신학 공부와 감옥 생활, 그리고 실천 졸업 후 선교사 부인의 한국어 선생이 되어 거창에 머물던 중, 교회 행사에서 금지된 곡을 불렀다는 이유로 5일간의 감옥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장학생으로 다시 선발되어 요코하마 신학교에서 4년간 신학을 공부하였으며, 박용길 선생과 함께 주일학교를 인도했습니다. 29세에 김천 황금동교회 전도사로 부임하며 정대위, 조선출, 김정준 목사 등과 인연을 맺었고, 이곳에서 독립운동 관련 고문까지 겪습니다. 다시 송창근 목사의 권유로 요코하마 공립신학교(후에 도쿄여자신학전문학교) 4학년에 정규 입학하여 졸업한 후 8.15 광복을 김천에서 맞았습니다. 조선신학교 교수로의 활동 광복 이후 송창근 목사의 상경에 이어 1945년 12월 말 공덕귀 여사도 서울로 올라가, 1946년 1월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 여자신학부 교수로 재직하게 됩니다. 이 시기 조선신학교에는 한경직, 김재준, 송창근, 정대위, 조선출 목사 등 한국 현대신학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퍼스트레이디 그리고 그 이후 1948년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 유학을 앞두고 있었던 공 여사는 주변의 권유로 당시 서울시장이던 윤보선과 결혼합니다. 4.19혁명 후 윤보선이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퍼스트레이디가 되었지만, 5.16 군사 쿠데타로 인해 1962년 3월, 대통령직 하야와 함께 6개월 만에 경무대를 떠나게 됩니다. 이후 공 여사는 구속자 석방운동, 기생관광 반대운동, 원폭 피해자 돕기 운동 등 다양한 사회운동을 전개했으며, 구속자가족협의회 의장과 YH대책위원으로 활동하며 박정희 정권에 항거하기도 했습니다. 1990년 윤보선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안국동 자택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냈으며, 자서전 『나 그들과 함께 있었네』를 남겼습니다. 여행 TIP 공덕귀 여사의 생가는 통영시 충렬4길 26에 위치하며,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영부인 공덕귀 여사 생가’라는 표지석과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공 여사의 유년 시절은 통영의 선교사 활동, 기독교 확산과도 맞닿아 있으며, 그녀의 사회적 실천의 기초가 된 공간으로 의미를 지닙니다. 자서전 『나 그들과 함께 있었네』에는 통영 시절을 포함한 공 여사의 생애 전반이 기록되어 있어, 방문 전 참고하면 이해의 폭이 넓어집니다.
이순신 장군을 모신 사당 충렬사는 통영시 명정동 213번지에 위치한 사당으로, 임진왜란 당시 수군통제사로서 큰 업적을 남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이 사당은 1606년 제7대 통제사 이운룡이 왕명을 받아 창건하였으며, 1973년에 사적 제23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음력 2월이면 경내에 피어나는 네 그루의 동백나무가 청렴하고 절조 있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여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경내 구성과 명나라의 예물 충렬사에는 정침을 비롯하여 내삼문, 동제, 서제, 중문, 숭무당, 경충제, 외삼문, 비각 6동, 강한루, 전시관, 홍살문 등 총 24동의 건물이 자리하고 있으며, 경역은 약 9,068㎡에 이릅니다. 전시관에는 명나라 신종황제가 하사한 8가지 예물인 명조팔사품(보물 제440호)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중 의장물로 도독인의 1점과 함께 호두령패, 귀도, 참도, 독전기, 홍소령기, 남소령기, 곡나팔 등은 각 2점씩 보존되어 있어 귀중한 역사 자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향사와 민담으로 이어지는 역사 교육의 장 충렬사에서는 매년 춘계향사, 추계향사, 그리고 4월 28일 이순신 장군의 탄신제 행사가 열려 장군의 위훈을 기리는 뜻깊은 시간을 제공합니다. 이와 함께 충렬사에는 명정샘에 얽힌 신비로운 민담이 전해지며, 이를 통해 후세와 외국인 관광객에게 이충무공의 정신을 전하는 교육의 장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여행 Tip 충렬사는 1606년 왕명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현재 사적 제23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경내 전시관에서는 명나라 신종황제가 내린 명조팔사품(보물 제440호)을 관람할 수 있습니다. 매년 춘계향사, 추계향사, 4월 28일 탄신제 등이 열려 장군의 위훈을 기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