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이라는 이름은 이미 조선시대부터 그만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브랜드였다.

이 고장의 빼어난 소목들이 만든 나무 가구와 소반은 '통영 장'이나 '통영 소반'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적 유명세를 자랑했다. 철종 때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한 국헌 이헌구(1784-1858)는 젊은 시절 '통영 장인이 만든 경상을 소반과 함께 2냥 2전에 마련했다'는 기록을 기쁘게 남기기도 했다. 호두나 무로 만든 아름답고 단단한 그 경상은 1809년이라는 제작 연대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견고함을 과시하면서 통영 장인의 솜씨를 보여준다.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조선시대의 통영은 수도에서 지리적, 심리적으로 아득하게 먼 곳이었을 것이다. 통영 앞바다 거제도가 고려시대부터 '변방'의 유배지였다는 사실로도 이 점은 증명된다. 그런데 누대에 걸친 명문가 자제 국헌이 굳이 머나먼 남쪽 땅 장인을 거론한 점은 당대에 이미 명품 브랜드로 자리 잡았던 통영 목가구와 통영 12공방의 위력을 보여준다.


통영 12공방의 역사는 조일전쟁(임진왜란) 때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순신이 전쟁에서 연승을 거두며 공을 세우자 1593년 나라에서는 전라, 경상, 충청 세 도의 수군을 아우르는 삼도수군통제사 벼슬을 내렸고, 처음 한산섬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했다. 이순신이 남긴 「난중일기」에는 통제영 주변에서 배를 짓고 무기를 만들고, 소금을 굽는 가마솥이며 고기 잡는 그물과 종이 같은 물품 등을 자급자족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기술을 가진 공인들과 승려들, 병사들 할 것 없이 차출되어 일했던 것이다.

조일전쟁이 끝난 지 6년 후인 1604년 당시 통제사인 이경준이 지금의 통영 땅인 두룡포로 삼도수군통제영을 옮겨 설치했다. 통영으로 옮긴 이후 이경준은 전국의 공인들을 불러들여 공방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통영 12공방의 시작이다. 한 지역에 이렇게 여러 분야의 공인이 모여 조직적인 공방의 체계를 갖춘 것은 전국적으로도 사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다. 정조 연간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통영지」와 1934년 발간된 「통영군지」에 12공방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18, 19세기에는 이 12공방에서 만든 제품들이 국내 전역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까지 그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


12공방이라고 하면 열두 곳의 공방이 모여 있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만 이때 12라는 숫자는 수학적인 의미가 아니라 수사학적인 의미다. 우리말에서 '아주 많다'는 의미로 12라는 숫자를 쓸 때가 종종 있다. 첩첩 고개는 열두 고개, 폭폭이 넓은 비단 치마는 열두 폭 치마, 규모 있게 으리으리한 양반 댁은 열두 대문이라 불렀다. 12공방 역시 정확하게 12가지로 분류되는 공방의 이름이 아니라 '온갖 공인들이 모여 있는 수많은 공방'을 가리킨다고 보는 편이 옳다.

기록으로 정리된 전성기 때의 12공방에선 부채, 옻칠, 장석, 그림, 가죽, 철물, 고리짝, 목가구와 생활용품, 금은 제품, 갓, 자개 등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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