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강·이필수 부부

순대 족발 35년!
스무 해 칼질 끝에 신혼집 장만

김수강·이필수 부부

"오빠, 사랑해"

한 프로그램이 중앙시장을 찾아 장터 사람들의 노래자랑 무대를 마련했다.

마이크를 잡은 이필수(69) 할머니, 진작 칠순을 넘긴 남편 김수강(4)씨에게 "오빠, 사랑해"를 연발했다. 신기한 듯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연신 질문을 쏟아내는 사회자에게 할머니는 누가 봐도 할아버지가 분명한 남편을 계속 '오빠'라고만 불렀다. 그 바람에 중앙시장 사람들과 전국 시청자들이 한참을 배를 부여잡고 웃었다. "지금은 할머니지만 무대 우에 선 새각시였던 때로 돌아가서" 그랬단다. 새각시일 때 못해본 '오빠'소리를, 그때 너무 아끼기만 했던 '사랑해' 라는 소리를 늦게나마, 아니 더 늦기 전에 해보고 싶었을 터다. 고른 노래도 "당신이 최고야" 였다. 가사에 마음을 담고 노래를 부르는 이는 별로 없다. 더더욱 '뽕짝'은. 그래도 한번 들춰나 보자.

사랑에 빠지면 눈과 귀가 먼다지만 '내 모든 걸 다 준다'는 저 노랫말은 요즘 세대들이나 나에게도 그렇게 가슴저리게 와닿는 이야기는 아니다.

좀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현실에서는 씨도 안 먹힐 '뻥'에 불과한 이야기일수도 있겠다.

노랫말을 곱씹어보니 가진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나'(주인공)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이 한몸 바칠 것' 을 맹세하는 듯하다. 사랑은 서로 가진 게 없을 때 더 뜨겁고 저린 법!

이쯤이면 뜬금없이 뭣하러 유행가 가사를 따지냐며 쉰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겠다.

하지만 김수강이 필수 두 어르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보니 두 분의 자취가 마치 받아 쓴 것처럼 저 노래 가사와 겹친다. 연애하는 호시절에나 할 '아낌없이 줄 거야'란 속삭임마저 모진 풍파를 견디고 견딘 지금에서 겨우 풀어놓는 것이 말이다.

  • 순대족발

    ▲ 순대족발

  • 가게 앞 모습

    ▲ 가게 앞 모습

  • 김수강·이필수 부부의 손

    ▲ 김수강·이필수 부부의 손


돈 벌러 서울 간다더니...

통영사람이면 제일은행 맞은 편 '충무 족발 순대'집을 모르는 이가 거의 없다. 서울 사람이 아무것도 모르고 와서 앉았다 하더라도 '돈 좀 만지고 살겠다'는 짐작이 설 만큼 붐비는 집이다.

나 또한 궁금해서 하루 매상을 여쭸더니 "족발이 한 250개, 순대가... 하이구 그란데 그런 걸 책에 쓰면 남사스러버서"하고 얼굴을 돌린다. 이제는 사교춤도 배우러 다니고 관광도 같이 다니고 하는 이 노부부의 신혼은 그야말로 '엄시'산 시절이었다.

"설에 쌀 팔 돈이 없어서 시아버지 제사도 못 지낼 판이라 이우지서 꿔서" 지내기도 했다.

'새각시'이필수의 남편 김수강은 거제 사등면 지석리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래도 '당신이 최고'여서 동지섣달 긴 밤 허투루 보내지 않고 줄줄이 5남매를 낳고 보니 갈수록 아이들 키울 길이 막막해 이내 돈 벌어오겠다고 서울행을 결심했다. 하지만 '다부' 빚만 늘었다. 각시는 아무래도 안 되겠기에 막내 딸을 들춰 업고 서울로 찾아갔다. 헌데 남편은 내려올 생각을 안했다. 바람이 났거나 서울각시가 또 하나 있었으면 더더욱 유행가 같겠지만, 돈 벌겠다는 약속을 접고 낙향을 하기에는 남편도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던 것이다. 각시는 "그라몬 나도 여기서 죽을란다"했다.

'멋모르는 촌것'들이 서울의 밑구멍에서 욕만 보게 된 사연이다. 남편은 페인트칠이며 남의 빨래며 온갖 잡일을 하면서 딴엔 가장 노릇을 한다고 했지만 각시는 더 죽을 맛이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서울 육교 위에서 고등어 동태도 팔아보고 옥수수도 팔아봤지만 겨울바람만 더 매섭게 스쳤을 뿐이다. 그 한길에도 각시의 등에는 서울인지 거제인지 '매착도 모리는'막내딸이 코를 훌쩍거리고 있었다.


각시, 억순이 되다

낙향은 형부가 와서' 사는 꼬라지'를 보고는 보쌈하듯 통영으로 끌고 와서야 이뤄졌다. 돈 안받을 테니 언니 내외 집에서 살라했고, 그렇게 한 3년을 얹혀 살았다. 남의 집 살이니 5남매에 시어머니까지 8명의 식구가 한 방에서 이리 꿈틀 저리 꿈틀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38년 전의 일이다.

통영 와서도 빚은 늘기만 했다.' 가만 처자빠 놀아서' 그랬다면 덜 서러웠을 것이다. 야채도 빵도 튀김도' 폴아보고' 포장마차에 리어카 과일장수도 해봤다. 고양이한테 쫓기는 쥐 마냥 경찰들을 피해 이리 숨고 저리 숨고 하던 시절이다. 김수강은 "잽히기도 마이 잽히지. 그래서 순하고 참하기만 했던 각시가 억척 아줌마가 되삔기라"한다. 억척 아줌마 이필수는 이판사판이라는 생각마저 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3,4년을 하다가 남편이 총각 때 부산에서 순대를 만들어 봤다면서 그걸 해보자고 하데. 뭘 해도 안되니깐 그거라고 못할 것도 없어서 해봣지. 중앙시장에 사과 판대기 하나 양재기 하나 놨어."

어디서 물건 떼서 파는 것도 아니고, 집에서 순대를 만들게 됐으니 일은 더 바빠졌다. 5남매는 할머니에게 맡겨 놓고 창자 장만하고 순대 삶아 눈 뜨면 나오고 12시 넘어야 집에 들어갔다. 노점 좌판에 가스버너도 없던 때다. 순대는 상전이라 얼릴 수 없어 연탄불 위에 모시고 이필수는 맨바닥에 앉았다. 시린 손과 얼굴은 시퍼렇다 못해 청색이 되어갔고, 다리는 멍이 들어도'디다 볼 여개'가 없었다.


순대·족발, 연달아 터지다

어느새 단골이 생기기 시작했다. 남편이 순대를 만들면서 이리도 해보고 저리도 해보고 '용을 쓴 게' 먹히기 시작했다. 김수강은 이 대목에서 어깨를 젖히고 얼굴이 환해진다.

"우짤 땐 마이 팔리고 우짤 땐 잭기 팔리고 해서 연구를 마이 했지. 그때 만든 건 입에 넣으면 꼬들꼬들한 것이 내가 맨날 무도 맛나더라고."

말 나온 김에 비법을 여쭸더니 이야기에 흥이 난 것은 난 것이고 대답은 아주 딴청이다.

"내가 장사 안 하고 마칠 때에야 통영시에 순대 도매하는 공장에 가서 그 기술을 갈차주끼라."

아닌 게 아니라 두 부부는 한때 순대를 소매에 넘기는 공장도 집에서 했다. 나중엔 집을 옮겨 정화조 시설이 안 돼 그만두긴 했지만 순대 공장도 가사에 적잖은 도움이 됐다.

순대를 3년 더 팔다가 중앙시장에서는 처음으로 족발을 내놨다. 이것 역시도 두 부부가 손수 만든 것이다. 족발을 삶을 때 12가지 재료를 넣어 맛과 냄새를 잡았다. 족발 찍어 먹는 양념이나 댓김치에도 "바뀌는 입맛도 쫓아가는 우리만의 수가 있다"고는 하지만 역시나 그 비법은 숨긴다. 하긴 다 알면 그게 비법이겠는가.' 일이 될라 쿤께나' 이게 또 금세 입소문이 뻥 터져서 안그래도 바쁜 사람을 더 바쁘게 했지만, 입 꼬리도 더 올라갔다. 요샌 순대보다 족발이 훨씬 상에 많이 오른다.

부부는 중앙시장 찬 바닥을 7,8년 기다시피 앉았다가 그리도 바라던 가게를 얻었다. 이필수는 처음으로 바람 벽 안에서 장사하게 된 그 기분을 "잠 안자도 몸 안 아프고 일 많아도 안 피곤하더라"고 전한다. 그땐 딸들도 커서 가게를 도왔다. 가게만 얻으면 소원이 없겠다 싶었더니 좌판에서 겪지 못한 일들이 벌어졌다. 그토록 가기 싫었던 경찰서를 제 발로 드나들게 생겼다.

"조선소 사람들이나 방위들이나 떼거지로 와서 묵고는 도망을 내삐데. 그런 거 저런 거 해서 하루 네 번은 나쁜 일이 생기는 기라. 저거야 재미삼아 장난삼아 하는지 몰라도 내는 우떻게 얻은 가겐데 그걸 참겄나. 끝까지 뛰가서 경찰서에 델꼬 갔어. 통영 어거지들을 우리집에서 다 잡았으니 고맙다 캐야지."

그래서 그런지 조선소 노가다고 방위고 수전 학생이었던 간에 지금은 애 낳았다는 둥 하면서 가게를 일부러 찾아와 문안 인사도 자주 한다.

"맛 안 이자삐고 오는 사람보다 훨씬 반갑제. 손님이고 시장 사람이고 내가 욕먹을 짓은 절대 안했어. 옛 생각이 나서 그랬던지 아이들을 델꼬 와서 성가시게 해도 되려 살갑게 맞았어. 지금 나가서 어디든 물어봐."

그랬다면 지금처럼 장사가 되겠는가. 내가 노부부와 이야기를 나눌 때는 해 떨어지기도 전인데 손님들이 가게 안으로 밀려와서 얼른 자리를 피해줘야 할 판이었다. 몸도 마음도 닳고 닳아 억순이는 되었을지언정 악순이는 아니되게 그렇게 이 악물고 살아 16년 전에는 번듯한 집도 장만했다.


"식구가 몇이요?"

집! 8명 식구이니 셋방 얻기는 또 얼마나 힘들었던가. 애들은 염치도 없이 쑥쑥 커서 더 부대끼니 마냥 언니 집에 얹혀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방을 보러 가면 제일 겁나고 듣기 싫은 소리가 "식구가 몇이요?"하는 거였다. 백방으로 다녀 봐도 여덟 식구한테 세를 줄 주인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이번엔 동서 신세를 졌다. 방 2개 딸린 12평짜리 슬레이트집을 동서가 사서 준 걸 1년 만에 갚았다. 그리곤 10년이 넘게 순대 족발 팔아 마침내 장만한 집은 16년 전 돈으로 5천이 넘어갔다. 집에 한이 맺혀 그런 것도 있고, 이필수가 꽃과 나무를 좋아해 정원을 탐한 것도 있어 대출 3천을 보태서 욕심을 좀 부렸단다. 하지만 빚지고 산 인생은 또 얼마나 징글맞았던가.

"좋기는 하지만 빚이 많아서 웃음이 안 나와"

또 하루 12시간을 칼질을 해 3천 빚을 3년 안에 갚았다.

되돌아보기도 싫을 만큼 서러운 그 세월을 '죽을똥 말똥 살아' 장만한 집에서 노부부는 "내가 아무것도 안 묵어도 쳐다보기만 해도 배가 부를"만큼 좋아하던 꽃과 나무와 난과 수석을 "아무리 피곤하고 바빠도 안 빼묵고" 돌보아 "남망산은 아무것도 아닌 정원"에서 '새각시'와 '최고의 당신'으로 살고 있다. 이제는 "처음부터 잘 되는 장사는 없어. 자꾸 연구를 해야지"하며 남 같지 않아 보이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넉넉한 조언도 던지고 산다.

결국 TV든 책이든 영화든 어디서든 많이 듣던 '고생 끝에 낙이 왔다'는 소리지만, 그게 또 '이우지' 이야기면 더 '가찹게' 들린다. 희망이 우리동네에 사는 것 같다. 마침 노부부의 막내딸이 동창 안사람이라 두 어르신의 손을 카메라에 담았노라했더니 "그 손이... 그게..." 눈시울부터 불거져 아무 말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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