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2010. 3. 19. 통영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을 기리기 위해 개관한 ‘윤이상공원-윤이상기념관’은 그가 생장했던 통영시 중앙로 27 (도천동 157) 주변일대를 통영시에서 매입하여 부지면적 6,437㎡에 1층 440㎡, 2층 354㎡의 건물에 유품 170여 점이 점시돼 있다. 한예종 민현식교수가 설계를 맡았다.
‘윤이상공원’에는 윤이상의 전신상이 있다. 죽을 때까지 꿈속에서도 그리던 고향 땅, 일본에 왔을 때 통영을 보기 위해 현해탄까지 왔다가 되돌아 간 그 고향의 옛 집에 서성거리고 있을 한 때의 모습을 새긴 듯 아주 인상적이다. 전신상은 마치 살아있는 듯이 자신을 찾아 공원을 방문한 이들을 반갑게 맞아준다. 사려 깊고 융숭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윤이상의 생전 모습 그대로다.
2층 전시실에는 북한에서 온 윤이상의 흉상이 어렵사리 전시돼 있다. 평양 윤이상 음악연구소가 소장한 흉상을 윤이상 평화재단에서 북한 만수대 창작사에 의뢰해 제작한 복제품으로 크기는 가로 54cm, 세로 49cm, 높이 83cm 이며 85kg의 동(銅)으로 견고하고 육중하게 만든 것이다.
북한 측으로부터 흉상을 기증받아 2009년 6월 4일 인천항까지 운반했으나 흉상 도착 직전 북한의 핵실험으로 인해 정부가 반입을 보류하는 바람에 흉상은 인천세관 보세창고에 장기간 보관돼 왔던 것을 <윤이상공원 - 윤이상기념>관의 개관일에 맞추어 전시하기위해 각계의 진정과 통영예총(회장, 정해룡)의 탄원으로 정부의 반출 승인이 나게 것이다. 오래지 않아 공원에 윤이상의 베를린 집과 꼭 같은 집을 지을 계획이다.
■ 윤이상은 누구인가?
윤이상은 1917년 통영시 중앙로 27 (도천동 157)에서 아버지 윤기현과 어머니 김순달 사이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열세 살 때에 바이올린과 기타를 배우고 연주하며 직접 선율도 써봄으로 인해 음악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자신이 만든 선율이 동네 무성영화로 상영하던 영화관에서 연주되던 것을 듣고 작곡가로서의 첫 꿈을 품은 이후, 서른 여덟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유럽으로 유학하여 온갖 간난과 시련을 극복하고 마침내 세계적인 작곡가의 반열에 오른 입지적인 인물이다. 40대 이후 독일에서 작곡한 것만 해도 120곡이 넘고 오페라·교향곡·협주곡 ·실내악에 이르기까지 장르도 매우 다양하다.
12음 기법의 창시자인 아놀드 쉰베르크의 제자인 요제프 루퍼를 사사했지만 음렬(音列 - 한 옥타브를 구성하는 12개의 음이 한번 씩 나오는 주제)음악의 도그마에 빠지지 않고 중심음(Hauptton)이라는 독창적인 어법을 개발해낸다. 화려한 장식음을 보태 각각의 음이 풍부한 음색 변화를 동반하면서 고유의 생명체처럼 살아 움직이며 흐르도록 했다. 바로 한국의 아악(雅樂)에서 느낄 수 있는 특징이다. 가야금 줄을 떨어 소리를 내는 농현(弄絃)을 관현악에 적용한 것이다.
윤이상이라는 이름을 세계에 알린 출세작은 1959년 독일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에서 초연된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이다. 철저히 서양기법에 충실했고 악보에는 수많은 음표가 난무했지만 실제로 들어보면 신비로운 단아함이 느껴진다. 유럽 음악가들이 이 작품을 주목한 것도 ‘정중동(靜中動)’의 세계가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윤이상의 음악은 다른 현대음악과 마찬가지로 처음 듣기가 어렵다. 연주하기는 더 힘들다. 하지만 한 번 그의 작품을 접해본 연주자들은 점점 빠져든다.
미국 뉴욕 브루클린 음악원의 음악당 건물 로비 벽면에는 이 학교 교수진이 선정한 ‘사상 최고의 음악가’ 44명의 이름이 동판에 새겨져 있다. 이 중 20세기에 활동한 작곡가는 조지 거슈윈, 벨라 바르토크,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그리고 윤이상 뿐이다. 그는 생존 당시 ‘현존하는 유럽의 5대 작곡가’ 중 한 명으로 선정된 한국인이다.
그러나 그의 조국은 그를 ‘상처 입은 용’(루이제 린저의 표현)으로 만든다. ‘동백림사건’으로 고통을 겪은 뒤 끝내 고향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타계한다.
‘동백림사건’이란 1967년 7월 중앙정보부(현 국정원)가 “서유럽에 거주하는 예술가와 반정부 지식인·유학생 등 194명이 동백림(동베를린)주재 북한대사관을 왕래하면서 간첩활동을 했다”고 발표해 세간에 알려졌고 윤이상과 이응로 화백, 천상병 시인 등이 연루돼 윤이상이 무기징역 등 34명이 유죄판결을 받은 사건이다.
윤이상은 생전에 “예술인으로서 평양을 방문했을 뿐 간첩활동은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많은 사람들은 이 사건을 단순히 북한과 접촉하거나 반정부 활동을 했을 뿐인데 중정이 간첩사건으로 조작했다는 것이다. “주의와 사상은 봄에 돋아나고 가을에 잎이 떨어지는 활엽수와 같으나, 민족은 푸른 하늘과 같이 영원한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윤이상의 민족관이었기에 조국의 분단은 그에게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현실이었을 것이다.
■ 통영은 윤이상의 음악의 뿌리
윤이상은 자신의 음악은 통영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고향에서 들었던 소리가 그의 음악의 모티브가 된 것이다. 통영은 일제강점기때부터 일찌감치 서양 음악을 받아들인 곳이며, 아악과 민속악을 주관하는 신청(神廳 - 악공조합)이 있었던 전통음악의 보고다. 윤이상은 독일 작가 루이제 린저와의 대담에서 어머니가 이웃 아낙들과 우물가에서 부르던 민요, 미륵산의 사월 초파일 행사, 승려들의 예불소리와 범종 소리, 동네 굿판의 무속음악, 부유한 외가 친척집에서 들은 전통음악 등의 소중한 경험이 그의 음악에 깔려 있다고 했다.
그는 아버지와 밤낚시를 하러 바닷가에 갔다가 듣곤 하던 멸치잡이 어부들의 남도창(南道唱)에 푹 빠져 “고국에 가면 남도창을 현대화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싶다”고 했다.
특히 1994년 귀국이 좌절된 후 통영시민에게 보낸 윤이상의 육성 메시지는 듣는 이들을 가슴 아프게한다.
“나는 통영에서 자랐고, 통영에서 그 귀중한 정신적·정서적인 모든 요소를 내 몸에 지니고 그것을 나의 정신과 예술적 기량에 표현해 나의 평생 작품을 써왔습니다. 구라파(유럽)에 체재하던 38년 동안 나는 한 번도 통영을 잊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잔잔한 바다, 그 푸른 물색, 가끔 파도가 칠 때도 파도소리는 나에겐 음악으로 들렸고, 그 잔잔한, 풀을 스쳐가는, 초목을 스쳐가는 바람도 내겐 음악으로 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