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 시인 대여 김춘수
통영시 통영해안로 373 (동호동)에서 남부럽지 않은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나 시인의 길을 걸어간 것을 보면 그는 생래적으로 시인이었던 모양이다. 우리나라 대표시인을 낳은 그의 집은 현재 다른 사람이 살고 있으나 언젠가 통영시에서 매입하여 복원하리라 본다. 남망산공원 입구의 동신약국 큰 골목을 접어들면 대문 앞에 생가표지석이 있다. 넓은 정원과 건물 등 언뜻 보기에도 부잣집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김춘수는 자신의 산문에서 생가와 가족 이야기를 자주 쓰고 있다. ‘통영’을 ‘토영’이나 ‘퇴영’으로 불러야 고향의 혼이 살아난다고도 했다.
“한 반세기나 전에 경남 통영시(그때는 통영읍이었다)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곳은 내가 나서 자란 고장이다. 나보다 한 세대 윗사람들은 ‘어머니’란 말 대신에 ‘오매’란 말을 썼다. 나는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가정방문하여 원생들의 말씨 중에서 어머니에 대한 것을 체크하고 있었다. 나는 그 때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고, ‘오매’라고도 부르지 않았다. ‘지찌야’라고 부르고 있었다.
‘지찌야’란 젖 먹여주는 사람의 뜻인 듯하다.(중략) 외할머니네 집에 가면 외할머니는 ‘통영’을 우리 고향 사람들이 하는 식으로 ‘토영’이라 하지도 않고 언제나 ‘퇴영’이라고 했다. 어머니가 바르게 말하는 걸 오히려 못마땅하게 여기기도 했다.(중략)
어쩌다 오랜만에 고향에 가보면 아무도 ‘오매’라고 자기 어머니를 부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 말을 들어본 사람들도 그 수가 아주 적어지고 있다. 산과 바다의 빛깔마저도 어딘가 달라져 있는 듯이 보인다. 지독한 사투리, ‘퇴영’과 같은 투로 우리 고향 산천을 불러주고 싶다. 그렇게 불러주어야만 우리 고향의 혼이 살아날 것 같다.”
김춘수의 대표에세이, 『왜 나는 시인인가』 「향수」에서
김춘수는 문재가 뛰어났고 문학적 소양은 아주 어릴 적부터 길러졌다.
“통영시의 북쪽에 여황산이라고 5백 미터가 될까말까한 산이 있다. 그 산은 그곳 초등학교(내가 다닐 때는 보통학교라고 했다)의 바로 뒤쪽에 다붙어 있었다.
그래서 그랬으리라고 생각된다. 교우지의 제호를 「여황의 푸른 빛」이라고 했다. 그 「여황의 푸른 빛」에 내 글을 자주 뽑아주고 한 것도 H선생이다. 그는 글짓기 시간마다 늘 말하기를 너희들이 자연스럽게 절로 사랑할 수 있는 것부터 잘 관찰하고 더욱 애정을 쏟도록 해야 한다. 이를테면 부모형제, 너희들이 나서 자란 너희들의 고향 같은 것 말이다. (중략) 여황산 중턱 거기서 보면 호주 선교사네 붉은 벽돌집이 있었고 탱자나무 울타리 사이사이 샛노란 죽도화가 피어 있곤 했다.”
김춘수의 대표에세이, 『왜 나는 시인인가』 「옛 동산에 올라」에서
■ 감옥생활
김춘수는 일본에서 유학 중 반 년가량의 감옥생활을 경험한다. 독립운동을 한 것도 아니고 사상이 불온한 것도 아니다. 단지 호기심에 노무자들과 어울려 잡담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그해 겨울을 나는 뚜렷이 기억한다. 겨울 방학이 되어 나는 집으로 돌아가려고 짐을 꾸리고 있는 내방에 하숙집 아주머니가 올라왔다. 고향사람이 밖에 와 있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누군가 싶어 곧바로 내려가 보았다. 얼른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키가 헌칠하니 크고 미목(眉目)이 수려한 내 또래의 청년이었다. 명함을 내놓는데 ‘야스다安田’라고 일본 성씨로 돼 있었다.
“왜 얼마 전에 가와자키川崎에서 만나지 않았습니까?”그때서야 기억이 겨우 되살아났다. 그는 요코하마 헌병대의 헌병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를 한국의 고학생으로 알고 있었는데 한 순간 섬뜩했다.
도코와는 지척의 거리에 가와자키라는 항구가 있다. 화물선이 거기서 풀기도 하고 싣기도 한다. 자주 석탄배가 들어온다. 그때 나와 아파트를 서로 이웃하고 있던 한국인 고학생이 두 사람 있었다. 그들은 토요일 오후 늦게 가와자키의 화물선에서 하역의 일을 맡곤 했는데 일요일 오전까지 하면 한 주일의 생활비를 벌수가 있었다.
나는 그럴 필요가 전연 없었는데도 호기심으로 그들을 따라 두어 번 거기를 가서 석탄 나르는 일을 해보았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한 시간쯤 일을 하고 나면 10분이나 20분쯤 쉬게 된다. 쉬는 동안에는 우리(한국인)는 우리끼리 모이게 된다. 우리는 모이면 우리말로 기탄없이 얘기들을 한다. 대부분이 진짜 노무자들이지만, 간혹 고학하는 학생들도 끼이게 된다. 그중 한 사람이 ‘야스다’란 자다. 그는 무슨 말 끝에 자기를 안가(安哥)라고만 소개한 기억이 난다. 평양 태생인데 중앙대학을 다니고 있다고 했다. 그도 물론 어울려 이런저런 애기들을 나누었는데, 천황이 어떻느니 총독이 어떻느니 하며 우리끼리 모이면 으레 내놓는 그런 욕지거리 섞인 되잖은 시국비판 같은 것도 오갔는 듯했다. 그러나 우리끼리 안심하고 우리말로 그랬던 것이다.
그런데 그 안가라는 고학생이 가와자키에서 노동을 해서 학비나 생활비를 버는 고학생이 아니라 노동판에는 건성으로 나돌았을 뿐 실지로는 요코하마 헌병대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것으로 그는 요코하마 헌병대로부터 일정한 보수를 받고 있었다.
짐을 꾸리다 내려왔으니, 짐을 마저 다 꾸리고 오겠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럼 외투라도 입고 오겠다고 해도 그것조차 들어주지 않고 나를 다그쳤다. 나는 실내복인 채로 그를 따라 나설 수밖에 없었다. 찌푸린 날씨는 살을 에는 듯했다.
요코하마 헌병대에서 나는 독방에 수감된 채로 꼭 보름 동안을 아무런 기척도 없이 지내야 했다. 감옥의 마룻바닥은 엉덩이를 거기다 가만히 붙여놓지 못하게 했다. 쉴 새 없이 엉덩이를 들었다 놓았다 해야만 했다. 그런 운동으로 열을 내야만 했고 엉덩이를 마룻바닥에 붙이고 있으면 금새 동상에 걸릴 것만 같았다. 속까지 한기가 확 스미는 것이 배겨낼 도리가 없었다. 일어서서 왔다 갔다 하는 보행운동을 하루에 수없이 되풀이 했다. 보름쯤 지나서 처음으로 불려나가 심문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나더러 대뜸 하는 말이 “자넨 거물이야!”였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나는 그런 곳에 가서 노동할 필요가 전혀 없었는데도 왜 거기 가서 한국인 노무자와 섞였느냐는 것이다. 너는 무슨 결사 같은 것을 가지고 있거나 그런 것을 만들 속셈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너는 또 고학생 두 사람을 뒤에서 조종하고 있지? 그렇지?”하고 다그치는 것이다.
“나는 나중에 그런 것을 애매하게 시인하고 말았다. 나는 고문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그때의 모욕감을 지금도 씻어내지 못하고 있다.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을, 왜 시인하고 말았는가? 생각할수록 이 또한 어이없는 일이었다.”
김춘수의 대표에세이, 『왜 나는 시인인가』 「나를 스쳐간 그·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