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일제시대에 건립된 이 건물은 통영지역의 3.1운동기념관 겸 통영 청년단회관이었다.
통영 청년단은 1931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될 때까지 10여년간 일제로부터 온갖 박해와 수난을 받아온 항일지하운동조직이다.
이 건물은 현재 통영문화원 원사와 충무고등공민학교 교사로 사용하고 있고 근대문화유산으로 등재 돼 있다.
■ 통영 청년단 창단
통영지역의 3.1만세시위 때 의거, 구금, 옥고로 이어지는 과정의 반복이 결코 능사가 아닐 뿐더러 만세시위만으로는 나라의 자주독립을 쟁취하는데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못한 다는 새로운 자각이 통영청년들 에게 움트기 시작한다.
통영의 각성된 청년들인 박봉삼 (朴奉衫), 임철규(林澈圭), 이영재(李永宰), 서상호(徐相灝), 이순장(李舜章), 김채호(金采鎬), 박종한(朴鍾漢), 방정표(方正杓), 김종원(金宗元) 김덕준(金德濬) 등은 송정택(宋正宅)의 사랑방에 모여 몇차례 숙의를 거듭한 끝에 1919년 7월 21일 341명의 회원을 모아 ‘통영 청년단’을 창단하고 초대 단장에 박봉삼을 추대한다.
박봉삼은 1875년 통영 서호동에서 태어난 기독교 장로로 1915년 통영 기독교청년회장에 피선되어 각종 집회나 강연회 등을 통해 자주독립사상을 일깨워 왔고 1919년 3월 13일의 통영장날 만세의거미수사건에 실질적인 지도자 역할을 한 사람이다.
이들 청년들은 1919년 10월 16일 허장완 열사의 장지에서 “우리가 이렇게 비통해 하며 울분만 토할 것이 아니라 하나로 뭉쳐 힘을 기르며 앞날을 기약하자.”고 맹세한다.
이상은 드높았으나 단원들의 구심체가 될 사무실과 사업을 시행할 기금이 없어 청년단의 사무실이 되어버린 송정택의 사랑방에서 의논한 결과 단원수를 늘리고 청년단회관건립 모금운동을 펼치기로 한다.
이영재가 대화정 238번지의 남새밭을 회관건립부지로 선뜻 내놓는다. 이 사실을 접한 경찰은 3.1운동 후 문화정책을 펼치던 시기였었기에 직접적인 탄압은 피하고 모금을 방해하는 쪽으로 공작을 획책한다.
많은 사람들이 항일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거나 타지로 피신하는 사태가 연달아 일어남으로 인해 모금은 지지부진하게 되나 그런 상황에서도 유학생 출신들이 악단(브라스밴드)을 조직하여 북치고 나팔 불며 시가행진을 하면서 통영 청년단을 홍보하고 동참을 호소하며 민족의식고취에 힘쓴다.
애초 전 군민의 주시 속에 의욕적으로 착공했던 통영 청년단회관은 당초의 계획과는 달리 착공 3년이 지나도 자금사정에 따라서 짓다가 말다가를 되풀이 하게 된다.
통영 청년단은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강습소를 열고 충렬사와 동부유치원을 전전하면서 배움에 목말라하는 청소년들에게 신학문 강습을 꾸준히 전개하는 중에 임철규가 제3대 단장을 맡게 된다.
임철규는 부진한 회관 준공을 위해 사재를 털어 건축비에 충당해도 턱없이 모자라자 그는 아우 창규(昌圭)와 협의하여 문중 전답까지 잡히고 마침내 회관을 준공토록 한다.
거금 1만 4,000원을 들여 4년여의 공사 끝에 대지 254평에 연건평 120평의 벽돌양옥 ‘통영 청년단회관’이 드디어 반듯한 모습을 세상에 드러낸다. 1923년 11월 18일의 낙성식은 통영군민들의 축제일이었다고 당시의 낙성광경을 동아일보는 크게 보도한 바 있다.
통영 청년단회관 건립 준공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나라를 빼앗긴 통분은 드디어 3.1운동으로 터져 전국을 독립만세소리로 쓸었다. 이 고장에서도 3월 13일, 18일, 28일, 4월 2일 네 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만세의거가 일어나 많은 청년들이 피검 투옥되었는데 그해 7월 이학이(李學伊)지사가 옥사(獄死)하자 이에 충격을 받은 청년들은 박봉삼(朴奉杉), 송정택(宋正宅) 등을 주축으로 통영 청년단(統營靑年團)을 결성하였다. 통영 청년단은 일제의 탄압에도 좌절하지 않고 독립정신의 함양과 민족단결을 부르짖으며 조국광복운동을 전개해 왔다. 특히 지육부(智育部)를 두어 명사 초청강연, 연극, 음악, 교양강좌 등을 개최하여 주민의 자질향상에 주력해 오던 중 마침내 단원 4백여 명의 의지가 결집되어 항일의 전당인 본 회관을 건립하였다.
일제의 갖은 방해와 자금난을 무릅쓰고 건립된 이 회관은 연건평 120평 규모의 2층 현대식 건물로써 총공사비 1만4천원을 투입 4년 간 공사 끝에 1923년 1월 18일에 준공을 받았다.
이 회관을 마련하기까지 단원들은 굳은 의지와 단결된 노력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대지 254평을 희사한 이영재(李永宰), 거액의 건립비를 희사한 임철규(林澈圭) 두 분의 높은 뜻을 기려 이 돌에 새긴다.
서기 1989년 10월 25일
■ 통영 청년단의 역할
통영 청년단의 ‘지육부(智育部)’의 강세제, 신수동, 김한기, 양재원, 박성숙 등이 강사가 되어 청소년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고 박세홍(世朴洪)이 훈련(체육)을 맡아 가르치나 쇄도하는 수강생들을 감당할 수 없어 주간과 야간으로 반을 나누어 강습을 한다. 수시로 시국강연을 개최하여 민족의식을 고양시킨다. 강사는 주로 박봉삼, 진평원, 최영기 등이 맡았고 자주 외부강사를 초빙해 듣기도 한다.
강연의 주제는 대개 ‘아는 것이 힘이다. 우리도 배우자.’, ‘흰 옷을 입지 말고 무색옷을 입자.’, ‘공중도덕을 지키자.’, ‘물품을 우리 손으로 만들자.’ 등 지극히 계몽적인 것인데 이는 경찰의 집회허가를 받아야 강연회가 가능하기 때문이고 실제 강연이 시작되면 강연 내용은 주로 항일자주의식고취다.
강연회가 열린다는 방(榜)이 거리에 나붙고 청년단 브라스밴드가 시가를 행진하며 강연회 개최를 알리면 기다렸다는 듯 청중이 운집한다. 참관석에는 고등계 형사부장이 앉고 일반 형사들은 청중에 섞여 앉았다가 강연내용이 주제와 동떨어진 민족과 사상으로 흐르면 호각을 불어 ‘주의’와 ‘경고’를 준다. 이런 상황이 몇 차례 반복되면 ‘중지’명령이 내려지고 강연회는 해산되며 연사는 붙잡혀 간다.
이와 같은 강연은 1930년 초반 일제의 대륙침략정책이 노골화되는 시기까지 계속된다. 통영 청년단은 1923년부터 불기 시작한 ‘조선물산장려운동’에 적극 호응하여 ‘우리 것을 먹고 입고 쓰자’라는 기치를 내걸고 군민운동도 벌인다. 또한 ‘내것, 조선것, 우리것’이라는 말을 통해 민족주의의식을 돋구고 토산품(국산품) 애용을 주창한다. 오늘날로 치면 그 사회에서 신망이 두텁고 존경을 받는 시민단체의 성격과 비슷하다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