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 생가표석제4대 대통령 윤보선 영부인 공덕귀
윤보선 대통령 영부인 공덕귀(1911~1997) 여사는 통영에서 대한제국 군인인 공도빈과 방말선의 5녀 2남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집에는 충렬4길 26이라는 안내표시판이 있고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영부인 공덕귀가 살았던 곳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서른 다섯 살에 혼자된 어머니는 바느질로 자녀들을 키워냈고 공덕귀에게는 용감하고 자랑스런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호주선교사들과 성경공부나 찬송가를 배우는 등 교류가 많았으며 동네 여인들은 그의 성경이야기를 좋아했다.
어머니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가담하여 투옥된 일이 있고 재건교회를 세워 장로로서 일생 주님을 위해 일했다.
공덕귀는 믿음의 여장부인 어머니의 뒤를 밟으며 호주선교회와 더불어 학창시절의 외연을 넓혀나간다.
■ 인도선교사를 꿈꾸던 팔방미인 최우등생
그는 다방면에 관심이 많고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하는 매사에 적극적인 성격이었다.
호주선교사는 그에게 늘 좋은 후원자였다. 공덕귀는 유치원 조보모, 통영진명여학교 야간 선생을 했다. 공립보통학교 졸업 후의 꿈은 인도 선교사였다.
스물 한 살의 늦은 나이에 호주선교부 장학생 선발에 합격하여 원했던 미션스쿨 동래일신여학교에 입학한다. 훤칠한 키에 피아노와 수영에도 뛰어난 팔방미인으로 ‘만가지 약장수’로 불렸고, 졸업식에서는 우등상, 도지사상, 4년 개근상까지 휩쓴 최우등생이었다.
호주선교사 부인의 한국어 선생이 되어 선교사를 따라 가 있던 거창에서 금지된 곡을 교회행사 때 불렀다 하여 5일간의 감옥생활을 겪은 이후 장학생으로 선발돼 요코하마 신학교에서 활기 넘치게 4년 간 신학공부를 한다.
동문인 박용길 선생(고 문익환 목사의 부인)과 같이 주일학교를 인도한다.
졸업후 스물 아홉 살에 송창근 목사의 경북 김천 황금동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여 한국교계의 거목 정대위, 조선출, 김정준 목사들과 인연을 갖는다.
이곳에서도 공덕귀는 황금동교회 독립운동사와 관련해 대구 도경의 고춧가루 물고문을 받기도 한다.
다시 송목사의 제의로 요코하마 공립신학교(후에 도쿄여자신학전문학교로 개명) 4학년에 정규생으로 입학, 공부를 하고 졸업 후 김천으로 와서 8. 15를 맞는다.
송목사가 곧바로 사직을 하고 상경한 후 공덕귀는 그해 12월 29일 상경, 다음해 1월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 여자신학부 교수가 된다.
한경직, 송창근, 김재준, 정대위, 조선출 목사 등 신학의 대가들이 다 모여 있는 곳이다.
■ 퍼스트 레이디
1948년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로 유학할 준비를 마쳤으나 주위의 간곡한 권유로 당시 서울시장이던 해위 윤보선과 결혼한다.
4.19혁명 후 해위가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에 취임하여 퍼스트레이디가 됐지만 우리 역사에 참된 민주주의를 꽃피울 절호의 기회에 5. 16군사 쿠데타로 인하여 1962년 3월 해위의 대통령직 하야로 경무대에서 떠난다.
공덕귀 여사는 5.16 쿠데타로 6개월만에 영부인자리에서 물러났지만 구속자 석방운방, 기생관광 반대운동, 원폭피해자돕기운동 등을 전개하며 적극적인 사회운동가로서 퇴임 이후 한층 빛을 발한다.
소박하고 매사에 열성적인 성품인 공덕귀 여사는 인권운동에도 관심을 기울였고 원폭피해자와 소외된 이웃을 위한 활동을 펼쳤고, 구속자가족협의회 의장과 YH대책위원을 맡아 박정희정권에 항거했다.
1990년 7월 윤보선 전 대통령 별세 후 안국동 자택에서 외롭게 살아왔다.
저서로는 『나 그들과 함께 있었네』자서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