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 생가표석서양화가 김용주
우리나라에 서양의 그림이 처음 소개된 것은 17세기 중국을 통해서였다.
당시 서학(西學)의 책자 속에 들어 있던 서양풍속화와 천주상(天主像)의 사실적인 서양기법과 현실감을 주는 색채는 우리 전통화법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 통영에 맨 처음 그림 전문교육을 받은 서양화가는 누구였을까. 통영출신 서양화가로는 1934년 동경 카와바타(川端) 미술학교 양화부를 졸업한 김용주(金容朱)가 처음이다.
그가 태어난 곳은 중앙동사무소 맞은편 길 따라 조금 올라가면 오른편에 ‘모아넷’이라는 상호가 달린 집이 있고 그가 살았다는 표지석을 세워 두었다.
■ 김용주는 누구인가?
그는 1910년 10월 14일 통영시 주전1길 12 (태평동 617) 에서 태어났다.
한말(1892년)인동도호부사를 역임한 만석꾼 김진현의 증손으로 어릴 적에 아버지(金淇洙)를 여의었으나
살림을 맡아하던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 속에서 부러울 것 없이 자란다.
1926년 통영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자 바로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에 진학하여 3년을 수료한 후 1929년 카와바다(川端)미술학부 양화부에 입학한다.
1934년 5년 과정을 마치고 졸업한 그는 이에 머물지 않고 같은 학교의 인체연구실에서 6년 동안 소우주(小宇宙)인 인체의 구조를 해부학적으로 분석하고 파악하여 이를 재구성, 종합하는 방법으로 표현기법을 연구했다.
1940년 귀향한 그는 항남동 9번지의 언덕 위에 화실을 마련하여 작품제작의 자세를 가다듬는다. 지금 그 곳은 초정거리에 있는 ‘명성레코드’가게 주인이 살고 있는 곳이다.
열두어 평 되는 아래 채를 화실로 쓰고 스무여 평의 위 채는 거실과 사랑방으로 사용했는데 사람 후덕하고 인심 좋은 그를 찾아오는 친구들 등살에 그림은 오히려 뒷전으로 밀리는 형국이었다 한다.
온화한 얼굴에 환한 웃음, 술은 입에 대지도 않으면서 술을 잘 사고 뛰어난 유머 감각으로 좌중을 항상 웃음바다로 만드는 그의 주위에는 언제나 많은 친구들이 있었다.
유치환, 유치상, 장응두, 서성탄, 최삼한기, 김기섭, 박재성, 황하수 등 당시 통영의 문화인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그의 화실을 출입했고 재일 독립운동가 정찬진은 통영에 올적마다 그의 집에서 잤다.
그는 짙은 색의 싱글을 옥색이 감도는 흰 와이셔츠로 받쳐 입고 까만 나비넥타이로 한 껏 멋을 부리고,
온화한 인상에 장발이 썩 잘 어울리는 미남인데다가 30대 초반의 그가 다방이나 카페에서 스케치북을 펴들고 순식간에 종업원들을 크로키하는가 하면 앞에 앉혀놓고 능숙한 솜씨로 데생하는 아주 로맨틱한 화가였다.
그런 일상에서도 치열하게 작품을 그려 1940년 제19회 조선미술전람회 양화부에 <회상>, <외출> 2점이 동시 입선되었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모든 미술활동을 ‘보국(報國)’이란 명목으로 얽어매는 이른바 ‘보국미술’을 강요하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작품 활동을 중단하고 투계, 사냥, 승마에 짐짓 몰두하며 식민지 예술가의 우울한 심회를 달래다가 해방이 되자 이때부터 그는 화실의 문을 열어 미술지망생들을 받아들인다. 이태규, 박종석 등이 그의 제자들이다.
그는 데생을 중시했으며 자신의 완벽한 데생력을 통하여 회화는 결코 속임수가 아니라는 강렬한 인상을 제자들에게 심어준다. 그는 인물화 특히 누드를 즐겨 그렸다.
1953년에는 통영으로 피난 왔던 이중섭을 산양면에 있던 그의 집 사랑채에서 이태규와 함께 기거하게 하며 나중 항남동 성림다방에서 열었던 이중섭의 개인전을 준비하게 도와주기도 한다.
195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자 김용주는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심화병을 얻어 불편한 몸인데도 작품 활동에 전념하다가 1959년 1월 15일 부산에서 타계했다. 그의 나이 50세였다.
그가 타계한 후 1959년 9월 ‘부산미술가협회’가 부산시 광복동 1가 ‘빠리쟝’다방에서 고인의 유작전을 1주일 동안 열어주고 1982년 11월에는 ‘미협충무지부’가 제2회 통영예술제를 맞아 ‘김용주화백 추모의 밤’을 마련하여 통영예술에 끼친 고인의 업적을 추모했다.
평생 300점의 작품을 제작했다하나 국립현대 미술관에 <투계>, <누드>, <소녀상>, <아내의 초상>, <옥잠화>가 소장되어 있고 호암미술관에 <자화상>, <바위>가 소장되어 있을 뿐 정작 그의 고향 통영에는 그의 작품이 몇 점 남아 있지 않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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