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이중섭은 6.25전쟁이 터지자 원산에서 부산으로 피난을 온다.
부산의 피난시절이 너무 어려워 1951년 봄에 서귀포로 피난을 갔다가 그 마저도 여의치 않아 다시 부산으로 돌아온다.
전쟁 통의 부산생활은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 이중섭은 경남도립 통영 나전칠기 기술원양성소(소장 양성봉 경남지사, 부소장 김봉룡) 강사로 있던 공예가 유강렬의 권유로 통영으로 피난 오게 된다.
그때가 1952년 늦은 봄이었다.
물론 그때는 이미 부인 이남덕과 두 아이를 일본으로 보낸 이후였다.
1954년 봄에 통영을 떠났다고 하니 통영에 머문 기간은 지금까지 알려진 6개월 보다 훨씬 긴 햇수로는 약 2년간이다.
이곳은 1910년 경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 도립통영공예학원 자리로 유강렬의 권유에
의거 이중섭이 김경승, 남관, 박생광, 전혁림 등과 함게 기거하면서 작품활동을 했던 곳이다.
시내 오거리에 있는 농협중앙회 건물 앞 도로 사거리에서 남쪽 바다 방향으로 50m정도 가면 왼편에 유료주차장이 있다.
주차장 옆 건물이 이중섭이 머물던 곳이고 표지석을 세워 놓았다. 또한 그 건물 담장에는 이중섭의 대표작 <소>의 그림이 붙어있어 눈길을 끈다.
1953년 통영에서 한 겨울을 지낸 화가 이중섭이 항남동 성림(聖林)다방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황소>, <부부>, <가족>, <달과 까마귀>, <도원>을 비롯하여 <초가가 있는 풍경>, <복사꽃이 핀 마을>, <세병관 풍경>,
<통영 앞바다>, <통영 풍경>, <통영 유원지>, <푸른 언덕> 등이 통영시절 남겼던 걸작들이다.
<남망산 오르는 길이 보이는 풍경>, <충렬사 풍경>, <달과 까마귀> 등의 작품이 전시된 성림다방에 들린 청마는 전시작품 중에서
특히 <달과 까마귀>에 매혹되어, 훗날 시 「괴변(怪變)―이중섭화 달과 까마귀(현대문학, 1967. 2)」를 발표하기도 한다.
통영에 온 이중섭은 김상옥과도 자주 어울리고 문화동 초정의 자택에도 드나들게 된다.
1953년 시집 『의상(衣裳)』출판기념회가 성림다방에서 있었다. 시집 한 권을 받아들고 술잔을 비우던 이중섭은 소리 없이 사라졌다.
다음날 이중섭은 다시 나타나 “나는 돈이 없어 축하금을 낼 수가 없어 그림으로 가지고 왔다”고 하면서 시집을 도로 내놓았다.
닭 한 마리가 꽃 한 송이를 물고 있고, 오른편에는 게와 꽃잎이 그려진 그림이었다.
이 그림은 김상옥의 이태원 자택을 드나들던 어느 제자가 떼를 써 80만 원을 내놓고 그림만 떼어 갔다.
이 그림은 가끔 ‘이중섭특별전’에 나타나곤 한단다.
재력가들의 후원으로 이중섭은 오랜만에 밥걱정 하지 않고 창작에 열중할 수 있었다.
당시 통영은 다른 곳에 비해 전쟁의 피해가 적었고 청명한 기후에 풍광이 아름다웠으며 먹거리가 풍부한 도시였다.
게다가 주변에는 서양화가 김용주를 비롯한 전혁림, 장윤성과 시인으로 청마 유치환, 초정 김상옥 등이 있었었기에 덜 외로웠을 것이다.
이중섭은 유강렬이 마련해준 다다미방에서 생활하면서 그림을 그리곤 했다.
통영 앞바다에 있는 미륵도의 용화사에 머물면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으며 도솔 선원에 있는 효봉 스님과도 잘 어울렸다.
이중섭은 통영에서 다작을 했다. 그 해 바로 <노을 앞에서 울부짖는 소>와 그 유명한 <흰 소>가 탄생했다.
<황소>, <부부>, <가족>, <달과 까마귀>, <도원>같은 대표작들도 모두 통영 시절의 작품이다.
이중섭에게 통영은 가족과 떨어져 있는 외로움을 달래고 정서적으로 안정된 상태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한 자양분의 공간이었을 것이다.
천재 예술가의 짧은 생은 마흔 살 비극으로 끝났지만 통영에서의 예술가 이중섭은 그의 그림 속에 따뜻한 풍경으로 영원히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