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초정은 1920년 5월 3일(음) 경남 통영시 항남동 64번지에서 아버지 기호 김덕홍 씨와 어머니 진수아 씨의 6녀 1남의 막내로 태어난다. 딸 여섯에 외아들로 태어났으니 태어난 환경부터가 그를 ‘왕’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부모와 여섯 누이들은 외아들 하나를 위해 모든 희생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의 거침없는 성격, 불의다 싶으면 어떤 타협도 거절하는 외고집은 이런 환경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조건 속에서 가정이 부유했거나 사는 데 걱정 없었더라면 아마도 이 외아들의 일생은 실패작으로 끝날 수도 있었을 것이나 그러나 가난이 그를 ‘시의 제왕’으로 단련시켰고, 가난했기에 가난을 극복하려고 더욱 강인해 질 수밖에 없었다. ‘가난이 곧 학교’라는 말은 초정의 경우에는 진실이다.
■ 시비초정 김상옥 「봉선화」
남망산공원에는 초정의 시 가운데에서 오래도록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온 시 「봉선화」가 시비로 서있다.
그 거리를 오고가는 사람들이 그냥 스쳐 지나려 해도 지나칠 수가 없게 눈길을 사로잡는다.
남망산조각공원 상층부에 위치한 초정의 「봉선화」시비가 아름답다.
비오자 장독간에 봉선화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울까 웃으실까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 들이던 그날 생각 하시리
양지에 마주앉아 실로 찬찬 매어주던
하얀 손 가락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
지금은 꿈속에 본 듯 힘줄만이 서노나
초정 「봉선화」(『문장』3호 1939. 10)
읽어보면 볼수록, 낭송하면 할수록 시가 서정적이고 감미롭다. 쉬우면서 어렵지가 않다. 너무나 평이하다.
쉽고 어렵지 않으면서 가슴을 몽클하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감동이라고 한다. 명시라고 하는 시들은 대개 이런 유의 시들일 것이다.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김소월의 「진달래」, 박목월의 「나그네」, 서정주의 「국화꽃 옆에서」 청마의 「깃발」,
천상병의 「귀천」 예이츠의 「이니스프리의 호도」,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 등의 시들이 다 그렇다.
이 시조에 등장하는 시어들 자체가 단순 소박한 것들이다.
비, 장독간, 봉선화, 누님, 편지, 고향집, 손톱, 꽃물, 양지, 실, 하얀 손, 힘줄 등 모두 우리네 전통적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질박한 소재들 뿐이다.
소박하면서도 진솔한 서정의 품격을 갖춘 이 시는 초정이 1936년 독서회사건으로 통영경찰서에 첫 번째로 투옥됐다가 출감하게 된다.
구속이 되었을 때 통영경찰서 미결감에 면회를 와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다가 간 누님(초정은 넷째 김부금 누님의 피부색이 검다고 ‘깜둥이 누님’이라 불렀다)이
불러서 누님이 살고 있는 곳으로 찾아간다. 하나 밖에 없는 남동생이 옥살이를 했던 것이 안쓰러워 불렀던 것이다.
누님은 머나먼 함경북도 청진에서도 기차를 갈아타고 나진과 웅기(지금의 선봉)를 거쳐 두만강 구역에서 내려 걸어서
최북단 두만강변의 변씨(邊氏) 집성촌에 시집을 가서 살고 있었다.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가 만나는 이곳은 북녘 땅에서도 오지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열일곱 살의 초정은 그곳 사람들에게 먼 이방에서 온 사람들로 비쳤을 것이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지독한 추위와 (초정은 훗날 만주에 왜 안 갔느냐는 큰 딸 ‘훈정’의 질문에 만주의 추위가 겁이 나서 못 갔다고 했다) 말씨도 다르고
음식도 다른 그곳에서 초정은 고향 통영의 따스한 날씨며 고향 사람들의 정겨운 말씨와 바닷가 고향 음식이 무척이나 그리웠고 향수병에라도 걸렸을 것이다.
「봉선화」는 이런 연유로 세상에 탄생했을 것이다.
■ 누님의 죽음
고향집 장독간에 핀 봉선화로 초정의 손톱에 꽃물을 들여 주었던 누님이 넷째 ‘깜둥이’부금 누님일 수도 있고 다른 누님일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어린 동생이 통영경찰서에 구금됐을 때 그 먼 길을 찾아와 동생을 면회했고 초정이 안쓰러워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이
오지 중의 오지임에도 불구하고 초정을 불러데리고 있었으니 부금누님이 인정스럽고 자상하고 다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초정의 손톱에 꽃물을 들인 것은 부금누님이었을 것이다.
그런 부금 누님은 젊은 나이에 어린 아이들을 남겨 두고 세상을 뜬다.
초정은 누님의 임종을 지켜봐야 했다.
「봉선화」를 쓰던 심정과는 정반대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부금누님에 대한 시를 남긴다.
“고이 젖은 눈썹 불빛에 깜작이며 / 떨리는 손을 들어 가슴 우에 짚으시고 / 고향에 늙은 어무니 뵙고 싶어 하더이다 //
그밤에 맑은 혼은 고향으로 가셨든지 / 하그리 그린 이들 이름을 부르시고 / 입술만 달삭어리며 헛소리를 하드이다 //
마지막 지는 숨결 온갖 것을 갈랐건만 / 어린 것 품에 안고 젖꼭지 쥐어준채 / 새도록 눈을 쓸어도 감지 않고 가드이다”
초정 「누님의 죽음」전문, (원문대로 표기)
초정은 부금 누님이 죽기 전 그 댁에 머물 때에 쓴 「봉선화」로 『문장』3호(1939. 10)에 당선되어 시인으로 데뷔한다.
그의 나이 스무 살 때다. 이 작품을 보고 초정을 시인으로 추천한 가람 이병기의 작품 평은 「봉선화」가 얼마나 좋은 시인지 알게 한다.
좋은 것은 어디에 있든지 누구의 눈에서나 다 좋게 보이기 마련이다.
“봉선화! 이 꽃을 보고 누님을 생각하고 누님과 함께 자라나던 옛날을 생각한 것이 또한 봉선화 모양으로 연연하기도 하고, 그리고 서글프기도 하다.
‘하얀 손 가락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 / 지금은 꿈속에 본 듯 힘줄만이 서노나’하는 것이 얼마나 그립고 놀라운 일이냐. 이런 정이야 누구나 가질 수 있지마는,
이런 표현만은 할 이가 그리 많지 못할 것이다. 타고난 시인이 아니고는 아니 될 것이다. (중략)”
가람 이병기가 초정을 타고난 시인이라고 했듯이 미당 서정주도 초정을 가리켜 천부적인 시인이라고 했다.
“그는 모든 사물을 볼 때 마다 거기 살다가 죽어간 옛 어른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넋을 찾아내는 데 있어
우리 시인들 중에는 가장 뛰어난 눈을 가진 선수이다. 귀신이 곡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의 시 속에는 늘 귀신도 많이 참가하여 곡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서정주, 김상옥 시집 『먹을 갈다가』 (창작과 비평사, 1980) 뒤표지
백 년 만에 한 명 나올까 말까한 시인이라는 미당조차도 초정을 가리켜 ‘귀신이 곡할 만큼’즉 귀신이 울고 갈 만큼 시를 잘 쓴다고 평하자,
초정도 미당을 친일문학가라고 하는데 대해 “미당이 나라를 팔아먹지 아니한 이상 그는 그의 시로서 이미 용서 받았다.”고 미당을 옹호 했다.
역시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 눈이 있는 것이다.
초정은 「봉선화」시 한편으로 그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했고
우리는 남망산과 초정거리에 있는 「봉선화」를 읽어 봄으로 좋은 시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되는 행운을 얻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