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혼이 깃든 문학비를 찾아서
통영인들에게 남망산은 하나의 신적인 존재이며 어머니처럼 그리운 산이다. 남망산은 통영항과 동호만을 가르며 길게 바다로 내민 해발 약 72m의 조그마한 산이다. 예로부터 송림이 울창하여 마치 강구에 떠 있는 섬처럼 산그늘을 드리우며 주변경관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산언덕에서 바라다 뵈는 해안 풍광 또한 절경이다.
청마 유치환, 초정 김상옥, 대여 김춘수 등 국보급 시인들이 뻔질나게 오르내리며 작품을 구상했던 곳이다. 풍경화를 잘 그리지 않던 이중섭이 통영으로 피난 와 아름다운 남망산을 소재로 풍경화를 그렸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통영의 문학비를 소개하면서 남망산을 침이 마르도록 치켜세우는 것은 통영문학을 낳은 모태와도 같은 특별한 곳이기도 하거니와 이곳에 국보급 시인의 시비가 있기 때문이다.
잘 아시다시피 통영은 눈길 주는데 마다 임란 유적지 아닌 곳이 없으며 발 길 닿는 곳이 모두 작품의 무대다. 이곳저곳 가는 곳 마다 작가들의 입김이 뿜어져 나오는 동상과 시비를 비롯하여 벽화, 아트타일 등이 문화예술의 도시임을 증명하고 있다. 낭만산공원, 시내, 그 외 지역 등으로 나누어 문학비를 소개하고자 한다.
<콘텐츠 제공 : 수필가 김순철>
청마거리의 ‘향수’와 ‘행복’시비
개요
청마거리의 ‘향수’와 ‘행복’시비
■ 시비청마 유치환 「향수」
통영시에서 시내 주 간선도로를 4차선으로 확장하면서 중앙로와 청마거리 사이의 삼각형 자투리 공간을 소공원으로 꾸미고 그 자리에 「향수」시비를 세웠다.
시비 주변에는 시민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나무를 심고 의자를 비치해 놓았다.
다른 도시 같았으면 그런 조그마한 크기의 쓸모없는 땅에는 기껏해야 관상용 꽃으로나 치장해 놓는데 통영은 발상부터가 예향답다.
예향 통영에서 공무원을 하려면 미적 예술적 감각을 지니지 않으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든다.
중앙동우체국 앞의 「행복」시비와 지근거리에 있는 「향수」시비는 「행복」과는 다른 느낌을 주는 시다.
나는 영락한 고독의 까마귀
창랑히 설한의 거리를 가도
심사는 머언 고향
푸른 하늘 새빨간 동백에 지치었으라.
고향 사람들 나의 꿈을 비웃고
내 그를 증오하야 폐리같이 버리었나니
어찌 내 마음 독사같지 못하야
그 불신한 미소와 인사...
소개
■ 시비청마 유치환 「향수」
통영시에서 시내 주 간선도로를 4차선으로 확장하면서 중앙로와 청마거리 사이의 삼각형 자투리 공간을 소공원으로 꾸미고 그 자리에 「향수」시비를 세웠다.
시비 주변에는 시민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나무를 심고 의자를 비치해 놓았다.
다른 도시 같았으면 그런 조그마한 크기의 쓸모없는 땅에는 기껏해야 관상용 꽃으로나 치장해 놓는데 통영은 발상부터가 예향답다.
예향 통영에서 공무원을 하려면 미적 예술적 감각을 지니지 않으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든다.
중앙동우체국 앞의 「행복」시비와 지근거리에 있는 「향수」시비는 「행복」과는 다른 느낌을 주는 시다.
나는 영락한 고독의 까마귀
창랑히 설한의 거리를 가도
심사는 머언 고향
푸른 하늘 새빨간 동백에 지치었으라.
고향 사람들 나의 꿈을 비웃고
내 그를 증오하야 폐리같이 버리었나니
어찌 내 마음 독사같지 못하야
그 불신한 미소와 인사를 꽃같이 그리는고.
오오 나의 고향은 머언 남쪽 바닷가
반짝이는 물결 아득히 수평에 조을고
창파에 씻친 조약돌 같은 색시의 마음은
갈매기 울음에 수심 저 있나니
희망은 떠러진 포켓트로 흘러가고
내 흑노같이 병들어
이향의 치운 가로수 밑에 죽지 않으려나니
오오 저녁 산새처럼 찾아갈 고향길은 어디메뇨.
「향수」전문. 당초 이 시는 1934년 2월 21일 동아일보에 개재된 작품을 개작하여 청마시초에 발표
다 같은 「향수」의 시라도 정지용의 「향수」는 나약하고 감미롭고 섬세한 여성적이라면
청마의 「향수」는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 같고 팔뚝에 힘줄이 불끈불끈 솟는 남성적인 시다.
시 낭송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청마의 시가 낭송하기에 제일 좋단다.
낭송가들이 낭송모임에서 청마의 시를 즐겨 애송하는 것도 다 그런 이유가 있었다.
청마의 시 중에서 「향수」는 비감한 시다.
고향 사람들이 무슨 이유에선지 자신의 꿈을 비웃기에 그들을 미워하여 헌신짝처럼 여기기로 마음 다잡지만
결국 시인이란 모질고 독하지 못해 고향과 그들을 그리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시인의 원초적 본능이다.
위대했던 예수나 공자나 노자도 자신의 고향에서는 인정받지 못했다던데 시인이라고 마냥 존경만 받았겠는가.
오고가는 사람들이 「향수」를 읽고 비감함을 느낄 것이다.
■ 시비청마 유치환 「행복」
사랑하는 한 여인에게 5천 여통의 편지를 부쳤다는 우체국이 있었고 그것이 사실이라 한다면
편지를 쓴 사람이나 받은 상대방, 부친 우체국 모두 다 기네스북에 등재될 만큼 세인의 관심사임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그런 엄청난 일을 한 시인이 있었다. 그 이름은 청마 유치환. 그를 가리켜 우리는 편지의 시인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전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얼마나 사랑이 간절하고 절절했기에 5천여 통의 사랑의 편지를 썼을까.
우체국과 관련하여 시비가 있는 것도 그리흔치 않은 일이다.
그러나 통영에 오면, 통영 중앙동우체국에 오면 출입구 왼편에 큰 책을 펼쳐 놓은 모양에 어린아이 키 크기의 화강석에 새겨 놓은 청마의 시가 있다.
청마의 행적을 찾아서 통영을 오고간 사람들이 만져서 손때가 묻은 청마의 「행복」시비가 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행복」전문(시집,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발췌. 이 시는 『문예』지 1953년 초 하호에 발표됨)
중앙동우체국 앞 오른쪽에 이문당서점이 있었고 그 서점 맞은편에는 다방이 있었다.
그 다방 밑 건물에는 시조시인 이영도의 언니가 수예점을 운영했다.
우체국 창문가에서도 그 수예점이, 수예점에 앉아서 수를 놓고 있는 여인이 훤히 보였다고 한다.
사랑이란 워낙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기에 청마는 이영도에게 하루에도 몇 번씩 편지를 쓰면서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 「행복」시에 대한 청마의 자전적 해설을 읽어보면 왜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한 것인지 그 까닭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청마가 말한 「행복」시의 해설을 들어보자.
사랑함은 사랑을 받는 일보다 행복하다는 이 얼마 안 된 것 같으나
그러나 한량없이 지복한 복음에 이르기까지에는 얼마나 숱한 통곡과 몸부림을 겪고 치른 후이겠습니까?
필경 인간은 누구를 하나 사랑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것인가 봅니다.
그리고 내가 누구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보다 내가 누구를 사랑하는 편에 더 큰 희열과 만족이 따르는 것인가 봅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받는다는 일은 내가 소유됨이요, 내가 사랑함은 곧 내가 소유하는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소유한다는 사실은 곧 다른 하나의 나를 설정한다는 일이 아니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지없이 허무한 목숨에 있어서 나를 하나 더 설정하여 가질 수 있는 가능은 얼마나 큰 구원의 길이겠습니까?
내가 아낌없이 보내는 사랑에 하나의 목숨이 지극한 신뢰와 환희를 입고 목숨을 누릴 수 있다는 일은 그대로 준 것만이 아니라
내게로 말할 수 없는 환희와 흡족을 갚아 보내는 은혜도 찾을 수 있는 일입니다.
흔히 말하기를 미움도 사랑의 한갓 변형된 표현이라 합니다. 진정 사실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세상에는 사랑보다 미움이 많다고 탄식하는 그 말대로 그 많은 미움들이 진정으로
악의의 미움 그것이라면 어찌 이같이 많은 인간들이 착잡히 어울려 수만 년을 여태토록 살아왔으며 또한 한시인들 더 참아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세상에는 많은 미움처럼 보이는 그 안쪽에는 더 말할 수 없이 많은 사랑이 서로 연분 얽히고 거래되어
보이지 않는 인정의 꽃밭 속에서 삶들을 이룩하고 있음은 틀림없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인정의 연분들! 한번 우체국으로 가서 보십시오. 보이지 않는 인정의 연분들을 우리는 얼마나 쉴 새 없이 볼 수 있겠습니까?
생각하면 시인이란 이 같은 있고도 보이쟎는 귀한 것을 증거하고 또한 그 증거를 통하여 인간에게 용기와 이해를 가져다주는 일이 그의 직책이 아니겠습니까?
유치환, 자작시 해설집, 『구름에 그린다』 「1959년 신흥출판사 초판, 2007년 도서출판 경남 개편판」 P118~120에서
사람들에게 애송하는 시 한편을 말해보라고 하면 열 명 중 서 너 명은 반드시 청마의 시 「행복」을 좋아 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한 때 우리나라 성인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한 결과도 이와 비슷한 수치로 나온 적이 있었다.
요즈음 부쩍 늘어난 시낭송모임에 나가보면 어김없이 「행복」을 낭송하고 시낭송대회에서도 단골 메뉴로 등장한다.
사람들이 마치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듯이 「행복」을 주저리주저리 읊조리는 것은 물론 시 자체가 좋았을 것이고
시가 지닌 사랑의 함의가 좋아서도 그렇겠으나 아마도 그 시에 얽힌 사연도 단단히 한 몫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 「행복」에는 사연이 있다.
청마가 통영을 떠나 북만주로 간 것은 서른 두 살 때인 1940년 3월, 다니던 통영협성상업학교 교사를 사임하고 가족과 함께 북만주로 이주한다.
북만주로 떠난 동기에 대해 청마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무슨 다른 부풀은 희망에서가 아니라, 오직 나의 인생을 한번 다시 재건하여 보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나는 식민지 백성으로 모가지에 멍에가 걸려 있기도 하였거니와 그 보다도 조국의 푸른 하늘 아래에서
너무나 자신에 대한 준렬을 잃고 게을하게 서성거리고만 살아왔던 것입니다.
유치환, 자작시 해설집, 『구름에 그린다』(신흥출판사, 1959), p35.
북만주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해방되기 2개월 전인 1945년 6월인데
할아버지가 얼른 고향으로 돌아오라고 자꾸 손짓하는 꿈을 꾼 아내 권재순의 권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일본의 패망을 미리 알기나 한 것처럼 귀국해 북만주에서의 생활을 청산하지도 못한 채
그 길로 해방을 맞은 청마는 전혁림, 윤이상, 김춘수, 정명윤 등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결성하여 문화예술활동을 주도한다.
청마는 그 해 10월 통영여자중학교 교유(敎諭:교사)로 부임하면서(당시 발령 대장은 없음) 운명의 한 여인, 이영도를 만나게 된다.
이영도는 경북 청도군 청도읍 내호리 259번지 이종수(李種守)의 3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시조시인 이호우가 그의 오빠다.
스물 한 살 때 밀양 박씨의 부호 박기주(朴基澍)와 결혼, 대구에서 신혼생활을 꾸렸다.
그런데 남편이 폐결핵을 앓게 되자 그때 마침 이영도의 언니가 통영에서 수예점을 하고 있었으므로
날씨 온화하고 해산물 풍부한 통영으로 옮겨와 살게 된 것이다. 도천동 도리골의 기독교 장로인 김병기 집에 세들어 살았다.
사람들은 이 집을 흔히 ‘오동나무 집’이라 불렀다고 한다. 해방되기 전 해인 1944년도의 일이다.
그러나 남편 박기주는 결국 1945년 8월 10일 세상을 뜬다.
청마가 이영도를 만난 것은 이영도가 통영여자중학교의 수예나 가사를 가르치는 촉탁교원으로 부임한(1946년 10월 15일)이후일 것이다.
같은 직장의 동료로서 자연스럽게 대면을 했을 것이다.
세련되고 단아한 모습의 재색을 겸비한 이영도에겐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고결하고 개결한 그 무엇이 있었다.
그러기에 청마는 더욱 이영도에게 마음이 끌렸고 밤마다 편지를 썼을 것이다. 청마가 보낸 편지 하나를 보기로 하자.
사랑하는 정운
어젯저녁 일찌감치 자리에 든 탓인지 잠이 깨이기에 보니 열두 시 반.
여러 가지 생각에 전전반측(輾轉反側) - 한 시 반, 두 시 반, 세 시 반에 일어나 등을 켜고 앉아도 책조차 보기 싫어 하염없이 있노라니 종이 울림니다.
이제 먼동이 트려는 동쪽 하늘, 고목 위에 조각달과 별 하나이 걸려 있고, 미륵산은 마치 나의 꿈결에도 걷히잖는 당신 그리운 근심처럼 엷은 구름을 이고 있습니다.
아까 바시시 빗소리 같던 것은 나뭇잎 소리던가 봅니다. 당신이 계시는 골짝이에서도 한창 닭 울음소리가 잦습니다.
물론 당신도 일어나셨겠지요. 동쪽 창을 여옵니까? 운(芸)과 마(馬)와의 하늘을 바라보옵니까?
나의 고운이여, 애달픈 이여, 창창(蒼蒼)한 세월에서 우리의 소망이 곱게 바래져 가는 하루가 또 밝습니다.
7월 17일
당신의 마
성적(性的) 저속성을 암시하는 그런 저차원의 표현은 눈을 닦고 보아도 발견되지 않는다.
청마와 이영도와의 만남이 1946년이었고 서신 왕래는 청마가 별세하기 직전(1966년)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를 세인은 지고지순한 우정사라고 했다.
두 사람 사이에 플라톤적인 사랑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영도에겐 정결한 신앙이 있었다면 반면에
청마에겐 여성은 성애(性愛)의 차원을 넘어 영혼의 갈구에 대한 응답과도 같은 존재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청마는 자신의 사랑의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게 있어서는 여성은 단지 ‘섹스’의 대상이 아닌 그 이상의 마치 고독한 밤 항해에 아득히 빛나는 등댓불과 같이
나의 인생에 있어 항상 없지 못할 영혼의 어떤 갈구의 응답인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아니 마리아를 통해서 천주에게 이르듯이 내게 있어서는 이성에의 열애를 거침이 채울 수 없는 허망(虛妄)을 비치는 구원의 길이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유치환, 자작시 해설집, 『구름에 그린다』 신흥출판사, 1959), p96.
출처 : 본 콘텐츠의 저작권자 - 수필가 김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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