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 시인 청마 유치환
모든 것을 선의로 해석하고 남달리 꿋꿋한 정의감과 유머감각의 정신의 소유자 청마는 1908년 7월 14일 통영시 태평동 552번지에서
한의를 하는 아버지 유준수와 후덕스럽고 인자하고 예술적인 기질의 어머니 박우수와의 사이에서 5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다.
그가 태어난 생가는 도로 확장으로 인해 철거 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통영누비’라는 상호의 가게가 있고 그 맞은편에는 ‘영수당한의원’이 있다.
청마문학관에 당시의 모습 그대로의 원형을 복원해 놓았다.
■ 통영시 동문로 9 (태평동 552)와 고향 다툼
시인의 고향을 두고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법정 재판이 있었다. 작고한 청마의 고향이 통영이 아니고 거제라는 다툼이다.
통영시 정량동 청마문학관에 표기된 청마의 출생지, ‘통영시 동문로 9 (태평동 552)’를 삭제하고
유족들에게 정신적 피해에 해당하는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내용으로 유족들이 소송을 제기했다.
청마의 아버지 유준수는 8대가 살아온 거제시 둔덕면 방하리에서 태어나 통영 사람 박우수와 결혼하기 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장인 되는 사람이 좋은 사윗감을 얻으려고 수소문을 해보니 방하리에 사는 유준수라는 총각이 괜찮다는 주변의 권유로 데릴사위로 맞는다.
장인은 통영에서 한의원을 하고 있었고 아들이 없어 사위를 한의업에 종사토록 하기 위해 처가에서 신접을 꾸리도록 한다.
청마는 이렇게 하여 통영에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요즈음에는 산모가 아이를 해산하려면 주로 병원에서 낳지만 앞선 세대에는 거의 집에서 낳았다. 사정에 따라 다르나 흔히 친정에 가서 아이를 낳았다.
그런 시절이었으니 청마의 어머니 박우수 역시 기왕에 함께 살고 있던 친정집에서 아이를 해산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1908년) 통영은 거제 둔덕 방하리에 비해 월등히 도시화 된 곳이었을 것이다. 시가집에서 살다가 아이 낳을 때가 되면 도로 친정집으로 가는데,
친정에서 살고 있다가 친정 어머니 간호를 외면하고 일부러 궁벽한 한촌인 둔덕 방하리로 아이 낳으려 찾아갔을리가 없다.
이것은 논리적으로도 설득력이 없다.
청마는 자작시 해설집에서 자신의 고향이 어디인지 명쾌히 밝히고 있다.
더 이상의 논란의 여지가 없는 자신의 출생지라 하겠다.
“내가 난 때는 1908년 즉 한일합병이 이루어진 전전 해로서 갈팡질팡 시달리던 국가 민족의 운명이 마침내 결정적으로 거꾸러지기 시작하던 때요,
난 곳은 노도처럼 밀려 닿던 왜의 세력을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던 한반도남쪽 끝머리에 있던 바닷가 통영(지금의 충무시)이었습니다.
그리고 혈통으로는 내가 보통학교에 입학하는 지망서의 신분란엔 가에다 아버지께서 ‘평민(平民)’이라고 써 넣던 것을 지금껏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만큼
50년 전의 고질 같은 그 반상(班常)의 구별에 있어, 어쩌면 그것을 의지 삼고 날개 떨친 선대로부터의 물려받음을 가지지 못한 한갓 반항적 의식에서였든지
또는 밀려드는 새 시대의 조류에 민감한 감성에서였든지는 알 길 없으나, 그 전기(轉機)하는 혼돈하고 스산한 세대에 부닥쳐
오히려 해우창생(海隅蒼生)을 달갑게 자처하는 지체 없는 유생(儒生)인 젊은 의원의 둘째 소생으로 태어났던 것입니다.”
청마 자작시 해설집 『구름에 그린다』(1959 신흥출판사 초판, 2007 도서출판 경남 재판)에서
청마는 자신이 태어난 곳을 분명히 밝혔다. 그것은 거제가 아닌 통영이다.
“내게 이모님 한 분이 남아 계신다. 고향서도 바다 건너 있는 어머님 산소엘 갔다 돌아오는 길에 찾아뵙고 물러나오려니,
대문 밖까지 나오셔서 나를 보내시는 말씀과는 딴판으로 눈에는 눈물이 글성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적적한 솔바람 속에 홀로 누워 계시는 어머님 무덤을 대해 뵙고서,
덧없는 인생의 여러 생각에 잠겨 오던 터라, 나도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어찌할 수 없어 얼른 돌아서서 길을 나서고 말았다.”
청마 수필집, (『나는 고독하지 않다』, 「고향에 가서」)에서
여기서도 “고향서도 바다 건너 있는 어머님 산소엘 갔다”는 표현은 당시 통영에서 청마의 어머니 산소가 있는 둔덕골까지 가려면
배를 타야했다고 청마는 여러 곳에서 밝힌 바 있다. 둔덕골이 자신의 고향이라면 굳이 고향서도 바다 건너 있는 어머님 산소엘 갔다 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세살 위의 형 동랑도 자신의 수필(동아일보, 1937. 7. 22), 『자서전』(1975), 마산 MBC 출연 (1969. 2. 1) 등에서 자기가 통영에서 태어났음을 말한다.
대법원에까지 소송이 진행된 이 사건은 “이유없다”라고 기각하였다.
그것은 청마문학관에 표기된 청마출생지 “통영시 동문로 9 (태평동 552)”를 삭제하라고 한 것에 대해 법적으로 청마의 출생이자 고향은 통영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그러면 유족은 왜 아버지, 청마의 고향을 둔덕이라고 거제의 편을 들고 문학적인 청마의 유품들을 거제에 많이 주었을까?
거제시는 청마일가의 가족묘소를 비롯하여 청마의 윗대부터 살아온 아버지 생가의 복원과 청마기념관 등을
막대한 예산을 들여 복원하고 지어준 데에 대한 감사의 표현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통영에는 몇몇 식자우환(識字憂患) 층의 사람들이 남망산에 있던 청마의 형 동랑의 흉상을
친일이라 철거하여 유족을 아프게 하더니 급기야 청마마저 친일작가라고 하는 데에 거듭 마음이 크게 상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중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