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산연
추수가 끝난 빈 논 또는 조그만 도랑 얼음에서 썰매타기, 손수 깎아 만든 팽이치기, 풀이 다 마른뻔덕(언덕)에서 비료포대 미끄럼타기, 유리 조각이나 사기그릇 조각 모아 연실에 ‘백세 미이기’(사 입히기), 그 연실로 연 날리며 연싸움하기…시골출신 통영지기의 아스라한 추억의 ‘겨울레포츠’들이다. 컴퓨터와 게임, 학원, 방학 중 연수 등등에 밀려 야외에서 뛰고 솟고 뒹구는 놀이가 사라진 지금의 아이들은 무얼 하고 노는지, 아님 놀 시간이나 있는지…
각설하고, 1월 22일~23일로 예정되었던 제2회 이순신장군배 연날리기 대회가 구제역과 AI여파로 취소되었다는 소식에 아쉬운 마음으로 이순신 장군의 전술신호연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우리나라에서 연의 기원은 확실치 않으나 삼국사기 열전에 김유신 장군이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연을 이용한 것이 보인다. 그 이후로도 고려 말 최영 장군이 탐라국 정벌에 연을 이용했고,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통신수단으로서 연을 이용했으며, 영조대에 이르러 군사목적으로 날리던 연을 놀이목적으로 날리며 전국적으로 연날리기가 보급되었다.
이순신 장군이 사용했던 통신용 연은 ‘참연’이라고도 불리는 방패연이었다. 직사각형 모양의 연중앙에 둥근 구멍이 나있는데 이를 방구멍이라 하고, 이 방구멍 덕에 방패연은 올라가고 내려오는 것이 쉬울 뿐 아니라 센바람을 흡수하여 연을 잘 뜨게 하고 조종을 자유롭게 한다. 100여 종이 넘는 연이 있지만 방구멍이 뚫린 방패연은 견고함과 유연성 면에서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뛰어난 구조라 한다.
임진왜란 중 신호용으로 사용되는 방패연은 가로길이가 90~120cm정도의 대형연으로 앞서 말한 기본구조 위에 음양오행사상에서 5방위를 상징하는 청(동), 백(서), 홍(남), 흑(북), 황(중앙) 5가지 색으로 방향을 알리고, 여러 문양을 넣어 각각 다른 명령과 날씨 등을 알렸는데, 적군이 알지 못하도록 문양에 각기 다른 암호를 넣었을 뿐만 아니라 문양이 가진 의미는 극비였다.
현재 전해지는 31종의 이순신 장군 전술신호연은 통영과 사천 지역을 돌아다니며 구전으로 내려오는 자료를 수집한 이한욱씨가 재현한 것인데, 극비사항이었던 문양의 의미가 외부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아 기록으로 남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재현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의 전술신호연의 이름과 의미는 다음과 같다.
이 중 이순신 장군이 마지막으로 날렸던 연은 이봉산연으로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직전,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명령 한 후 사용되었으며, 이봉산 앞바다(통영 사량도)로 군사들을 집결시키기 위해 날렸다고 한다.
지금이야 스마트폰 하나면 전 지구가 실시간으로 연결되는 통신기술의 혜택을 누구나 누리고 있지만 400년도 넘은 먼 옛날에 자신의 명령전달 수단으로 연을 이용했다는 것은 놀랍고도 창의적 발상이다. 군사작전에 있어 “정보”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감지하고 있었던 이순신 장군이 적정을 알기 위해 정찰, 탐망, 간첩을 통한 첩보활동 등의 노력을 끊임없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군끼리의 정보전달 및 작전명령 하달을 원활히 하기 위한 수단을 강구했을 것은 자명하다.
이제는 연이 군사적 목적이 아닌 민속놀이로, 그나마도 정월대보름 연날리기 행사나 송액(送厄) 기원 연날리기에서나 볼 수 있게 되었지만 단순해 보이는 우리의 방패연 하나에서도 세계의 어떤 연보다 날렵하고 유연한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과학기술을 볼 수 있고, 비밀신호를 담아 정보를 전달하는 통신기술이 숨어 있으며, 음양오행의 철학을 실제 삶에 구현해내는 실용적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세계 제일 조선강국을 이룬 밑바탕에 이순신 장군의 세계 최초 철갑 거북선을 만들던 기술이 있는 것처럼 세계 1위 IT강국의 기저에 위와 같은 창의적 발상의 통신기술이 있는 것을 보면 지금의 ‘세계제일’의 위상은 우리 민족의 DNA속에 이미 정해졌던 운명인 것 같다.
이순신장군배 연날리기 대회는 구제역으로 올해 취소되었지만 사태의 추이를 보아 통영문화원에서는 음력 정월대보름날 전통연날리기를 개최할 수도 있다 하니 이순신 장군의 얼이 깃든 통영의 전통연이 많이 날려져 올해의 액을 모두 하늘 멀리 가지고 갔으면 한다.
ㅇ 연과 관련된 역사이야기
세계 최초의 연은 BC 400년 경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벗이었던 ‘알투스’라는 사람이 만든 연이라고 하며, 15세기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계곡이나 강의 거리를 측정하는데 연을 이용했는데, 이 방법은 1850년대 나이아가라폭포에 세계 최대의 현수교를 세우는 데에도 쓰였다. 또 1749년 스코틀랜드의 윌슨은 여러 개의 연을 한 줄에 매달아 ‘고도에 따른 온도차’를 측정하는 실험을 수행했다.
연을 이용한 과학실험은 미국대통령을 지낸 프랭클린의 번개 실험이 가장 유명하다. 프랭클린은 연실에 비단 손수건을 매달고 여기에 열쇠를 장치한 다음 번개가 치는 날 연을 띄워 열쇠에 불꽃이 생기는 것을 관찰했다. 그 결과 대기 중의 전기가 실험실에서 발생시킨 전기와 성질이 같다는 점을 실험으로 증명했다.
또한 연을 이용해 하늘을 날려는 시도는 다빈치로부터 시작되었는데, 1903년 11월7일 코디는 연에 매단 통을 타고 영국해협을 건넜다. 이런 노력이 글라이더를 거쳐 오늘날의 비행기를 탄생시킨 것이다.
동양에서는 BC 200년경 중국 한나라 때의 장수 한신이 군사적 목적으로 연을 사용한 것이 최초라고 전해진다. 한신은 전쟁이 있을 때마다 '연'에 사람을 태워 적의 성(城)을 정찰하였다. 또한 구몽록(鉤夢錄)에 의하면 항우가 이끄는 초군과 싸울 때는 소가죽으로 만든 커다란 '연' 아래 바구니를 메달아 대나무 '피리' 잘 부는 사람을 태워 구슬픈 망향곡을 부르게 하여 적병들의 마음을 동요시켜 항복하게 하였는데 그 '연'을 풍필(風筆)이라 불렀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연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의 ‘열전’에 신라시대의 김유신 장군이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연을 사용했다고 하는 기록으로, 신라 진덕여왕이 즉위한 정미년(647•선덕여왕 16년)에 신하 비담과 염종은 여자에게 나라를 다스리게 할 수 없다는 구실로 내란을 일으켜 여왕을 폐위시키려 했다. 이로 인해 여왕이 이끄는 군사들은 월성에서, 반란군은 명활성에서 대립, 10여일 동안 싸웠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밤, 하늘에서 큰 별똥이 떨어지자 왕군이 패망할 징조라 하여 왕군은 물론 백성들이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당시 왕군의 지휘관이었던 김유신 장군은 군사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민심을 수습하고자 허수아비 인형을 만들어 그것을 큰 연에 매단 후에 불을 질러 하늘로 올려 보냈다. 마치 별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같이 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김유신 장군은 이를 통해 “어젯밤에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고 소문을 내어 병사의 사기를 돋운 다음 반란군을 진압하였다는 내용이다.
또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고려말 최영장군이 탐라국에 남아있는 목호(가축을 기르던 몽고인)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탐라에 다다랐으나, 섬의 사방이 절벽이라 상륙할 수가 없었다. 결국 꾀를 낸 최영장군은 군사를 연에 매달아 병선에서 띄워 절벽 위에 상륙시켰으며, 수많은 연에 불을 달아 지자성(只子城)을 덮치게 함으로써 그 성을 공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조에는 세종대왕 때(1455) 남이장군이 강화도에서 연을 즐겨 날렸다는 기록과 임진왜란 중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통신용 연이 전해지며, 영조는 대궐에서 청, 홍편을 나누어 연을 날렸고 동,리 별로는 백성들의 화합을 도모하고자 연 날리는 것을 장려하고 즐겁게 관전하여 1725-76년 무렵에는 우리나라에 연날리기가 널리 보급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를 통해 연을 전해받은 일본에서는 정월에 부, 행운, 다산 등을 의미하는 학, 용, 물고기, 거북모양의 연을 날리며,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설날에 어린이들에게 연을 선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