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정량동의 청마문학관
59세의 길지 않은 생애를 살다간 청마 유치환은 후대에 아주 오랫동안 추억될 결코 짧지 않은 이야기를 남기고 갔다. 청마시초(1939), 생명의서(1947), 울릉도(1948), 청령일기(1949), 보병과 더불어(1951), 청마시집(1954), 제9시집,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1960), 미루나무와 남풍(1964),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1965) 등에 이르는 그의 시집 속에서 여전히 푸른 생명의 기운을 발하고 있는 그의 시와 편지쓰기를 좋아했던 그가 지인들에게 보내고 받았던 그 사연들, 그리고 20여 년간 정운 이영도 시인에게 보냈던 수 천통의 시 같은 펀지들…
청마는 1908년 통영 태평동에서 태어나 자라는 동안 통영보통학교, 일본 토요야마(豊山)중학교, 동래고등보통학교, 연희전문학교를 거쳤고, 성인이 되어서는 일본, 통영, 평양, 부산, 만주 등지를 이사 다니며 사진관운영, 백화점 근무, 농장관리인, 정미소경영, 교직생활까지 다양한 직업을 경험했지만 가만히 책을 읽고 뭔가 쓰는 일에 열중아했던 내성적 성격의 유년 시절부터 그의 마음은 항상 문학에 수렴되고 있었던 것 같다.
청마문학관 위편의 유치환복원생가. 본채 약방에는 주렁주렁 매달린 약초주머니들과 유약국 간판을 볼 수 있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에 물들지 않고 희노(喜怒)에 움직이지 않고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 유치환, 바위 중에서
라고 말하며 높고 준열한 남성적 의지를 보여주는 그였기도 하지만 정운 이영도에게 20여 년간 보낸 수 천통의 편지에서는 정인을 향한 애절한 가슴앓이를 보여주기도 했다.이미 처자식이 있는 유부남의 신분과 남편을 사별하고 홀로 딸을 키우는 미망인의 신분은 애초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기에 ‘뭍같이 까딱않는'‘임'을 향한 그리움은 더욱 애틋하였다. 통영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부산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펜을 놓을 때까지 20여 년간 거의 매일 정운을 향해 썼던 편지는 그대로가 시였고, 때 묻혀질 수 없는 본질적 사랑이었다.
청마거리에 위치한 통영 중앙동 우체국 바로 인근에는 정운의 살던 집이 있었기에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은 바로 ‘임’의 집 앞이었다.
‘시선집중’이라는 옷가게로 바뀐 이 곳은 ‘호심다방’ 자리로 우체국 바로 앞에 있어 청마선생이 자주 들러 커피를 마신 곳이었다.
통영 중앙동 우체국은 청마우체국으로 개칭을 시도했다가 청마의 친일행적논란으로 주춤하던 것이 최근 친일인명사전에서 청마의 이름이 삭제되며 다시 개칭의 불씨를 당기고 있다.
청마의 시 ‘행복’이 새겨져 있는 우체국 앞 시비.
청마거리 한끝에 세워진 청마흉상과 ‘향수’ 시비
남망산공원 내 시민문화회관을 지나 수향정으로 이어지는 길 우측에 청마의 또 다른 시비를 만날수 있다. 청마의 대표시라 할 수 있는 ‘깃발’이 예사롭지 않은 모양과 색의 돌에 새겨져 있는데, 늘 그 모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했다. 비녀인가? 생뚱맞은데… 지팡이인가? 글쎄, ‘標ㅅ대'라면 몰라도… 구름인가? 그런가 보다.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이 맨 처음 매달렸던 공중에 떠 있던 구름…
왜 시인이 되었느냐는 질문에 ‘연애편지를 자꾸 써 보십시오. 그러면 저절로 시인이 될 것입니다.’라고 했던 청마는 시인이 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을 하셨겠냐는 질문에 서슴없이 천문학자가 되었을 거라고 대답을 했다. 그에게 연애편지 쓰는 일과 천문의 이치를 밝히는 일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었을까? 인간사 어디에서나 생겨날 수 밖에 없는 번뇌를 벗어나 절대적 경지에 도달하고자 했던 ‘의지적 시인’에게 범인이 쉽게 근접할 수 없는 원형질의 사랑은 인간의 손이 닿을 수 없는 저 높은 하늘의 그것과 똑 같은 것이었으리라.
오는 2월 13일은 청마 유치환이 저 높은 하늘로 간 지 43주기가 되는 날로 통영 청마문학관에서는 추모제를 거행한다고 한다. 청마가 누군가를 그리워했듯 많은 이들이 청마가 떠난 후 그를 그리워하고 있다. 그를 향한 후인들의 그 마음에 때 이른 한송이 꽃으로 응답해 주었으면…
춘신(春信)
- 유치환
꽃등인 양 창 앞에 한 그루 피어 오른살구꽃 연분홍 그늘 가지 새로적은 멋새 하나 찾아와 무심히 놀다 가나니
적막한 겨우내 들녘 끝 어디메서적은 깃을 얽고 다리 오그리고 지나다가이 보오얀 봄길 찾아 문안하여 나왔느뇨
앉았다 떠난 아름다운 그 자리 가지에 여운 남아뉘도 모를 한 때를 아쉽게도 한들거리나니꽃가지 그늘에서 그늘로 이어진 끝없이 적은 길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