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윤오영님의 ‘40년전’ 기억 속 동대문에 ‘방망이 깎는 노인’이 있었다면 통영 강구안엔 40년전부터 ‘톱 씨는 할배’가 있다. 올해 75세의 강갑중 할배는 나이보다 훨씬 젊고 건강한 모습으로 지금도 강구안 언저리에서 톱을 만들며, 강구안과 함께 40년 이상을 생활해 온 이 곳의 터줏대감이다.
TV(KBS 6시 내고향), 지역신문 등에 소개되어 얼굴이 알려진 할배를 만나기 위해 무작정 강구안을 돌아다니다 공중화장실 옆에 톱 전을 펼쳐놓은 할배를 쉽게 찾았다. 마치 아는 사람인 양 반갑게 인사를 하고 취재를 요청하니 흔쾌히 승락하며, 바로 ‘톱 씨는’ 장면을 연출해 보인다. ^^
“이리 한가할 때 톱을 마이 씰어 나야 댄다.” 강구안에서 늘 하는 작업이란다.‘씰다’는 ‘쓸다’, ‘썰다’의 이 곳 사투리이니 톱으로 마당을 ‘쓰는’ 일은 없을 것이고, 톱을 ‘썰다’라는 말이 되겠는데, 톱날 하나하나를 갈아 예리하게 날을 세우는 작업을 일컫는 의미인 것 같다.
어떻게 톱 만드는 일을 시작했고, 왜 강구안에 붙박이가 되셨냐는 몇 가지 간단한 질문에 톱과 함께 한 40년 넘은 삶의 파편들이 순서없이 막 쏟아진다.
4남매를 남기고 일찍 떠나간 부모를 대신해 맏이였던 강갑중 할배는 동생들을 어떻게 먹여 살릴까 밤잠을 설치며 3년간을 이리저리 고민하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톱 만드는 일에 일생이 결정되었다고…고성 하이면이 고향이라 처음엔 고성을 중심으로 사량도, 거제도, 한산도, 남해 등 주로 섬을 돌며 톱작업대 하나 짊어지고 찾아가는 ‘출장서비스’로 일을 시작했다.
“장에 앉아 있어바야 아는 사람도 없고 아무도 안 찾아 오거마는… 알리질라모 한 3~4년 걸리는데 당장 묵고 살아야대는데 그리대나.”
요새 말로 하면 ‘공격적 영업’으로 지명도 없는 초기 시절을 잘 넘긴 셈이다. 그렇게 6~7년을 섬으로 다니다가 ‘넓은 데’를 찾은 것이 이 곳 강구안인데 할배의 영업적 안목이 돋보인다.
“섬배들이 요 강구안에 대고, 시장도 옆에 있어 장사도 잘 되고, 선전도 빨리 되고…”
말씀처럼 그간에 많은 단골을 확보했고, 알아보는 사람도 많고 방송 이후엔 서울, 강원도에서도 주문이 온단다.
처음 톱 만드는 일을 시작할 때 만들었다는 톱 작업대 겸 연장통. 남해안 일대의 수 많은 섬들을 할배 등에 업혀 돌아다녔을 이 작업대는 40년이 훌쩍 넘어 50년이 다 되어가는 할배의 가장 오랜 동반자이다.
연장통을 겸하고 있는 작업대에서 주섬주섬 나온 연장들. “이만치 길었는데 하도 뚜디리고 닳아가” 코가 반으로 줄어든 망치와 톱 원판이 되는 ‘쎄’(쇠)자르는 가위, 톱날 다듬는 크기별 망치들, 그리고 가위나 칼을 갈아주는 ‘구라인다’
강구안에 정착한 이후로는 리어카에다 연장과 작업대를 싣고 다니신다고… ‘집앞에 세아 노모 누가 훔치 가삐고, 끌고 가삐고… 니아카 몇 대나 이자삤는지 모린다.” ㅠㅠ;;;
톱을 써는 주연장인 줄은 수백자루나 바뀌어 나갔는데 그걸 버리는 것이 아까웠던 할배는 칼 갈아주는 ‘구라인다’에다 줄의 한 면을 예리하게 갈아 막칼을 만들어 그걸 또 파신단다. 공장서 나오는 칼보다 ‘엉캉 여물어’(훨씬 단단하여) 잘 들고 오래간다는 할배의 제품 설명. ㅎㅎㅎ
할배의 주력 상품 톱 등장. 한 자루씩 만들면 생산성이 낮아 일년 사업계획(?)에 따라 부산서 일년치 쇠를 사다가 큰톱, 중간톱, 작은톱 크기별로 재단을 하고 자루도 한번에 다 만들고 몰아서 조립해놓고 톱을 팔기 위한 마지막 작업, ‘톱 씨는’ 일은 강구안에 앉아 매일 시나브로 하신단다.
톱 찾는 사람에겐 톱 팔고, 사진 찍자는 사람에겐 포즈도 취해주고 이야기도 해주며, 주변 영감님들하고 사는 이야기도 하면서 그렇게 톱 날마다 각을 세우신다.
‘톱 씨는 할배’가 신문이나 방송에까지 소개된 것은 단지 톱 때문만은 아니다. ‘국민핵교’ 겨우(?) 나와 글만 아는 정도인 할배가 배운 적도 없는 시를 쓰기 때문이다.
“요 앉아서 가고 오는 배들 채리보모 마음이 짠하고 고마 글이 떠올라. 이런 꽃을 채리바도 술술술 나온다.” 며 자작시 한 수를 또 소개하신다. 작업대 옆에 붙여 놓은 A4 용지만한 종이들에는 ‘기다림’, ‘톱장수 40년’ 등의 글이 보이고 안주머니에서 꺼낸 종이에는 ‘탈고’중인 ‘통영의 굴 까는 아가씨’가 선을 보인다.
할배는 30~40편의 시를 직접 지었고, 그 중 ‘통영의 여인’이란 이 시는 작곡가 윤용우님이 곡을 만들어 어엿한 노래가 되었단다.
통영의 여인
강갑중
갈매기 배고파 먹이 찾아 날고 있네
똑딱선 오고 가는 통영항 연안부두
그리운 님 가신 배는 왜 안 오시나요
고기 잡아 만선되면 오시렵니까
깊은 밤 잠 못이루니 별을 보고 한숨 쉬고
달을 보고 손을 빌어 기다리다 지쳐가는
통영의 여인이라오
글이 막 떠올라 술술 써질 때도 있지만 막히면 며칠을 이리 써보고 저리 써보고 하며 누군가가 겪는 것과 똑 같은 ‘창작의 고통’도 겪으신단다. ^^
사람의 운명이 결정되는 계기는 참으로 여러 가지이겠지만 먹고 사는 일 앞에 ‘결정되어진’ 운명은 험난한 고통인 동시에 숭고하다. 밤잠을 설친 끝에 결정되어진 ‘톱 씨는 일’로 동생들 3명을 먹여 살렸고, 3남2녀의 자식들을 길러낸 이 손은 그래서 아름답다.
변변한 점포도 하나 없이 눈길 닿는 곳에 펼치면 점포가 되는 톱 써는 인생 40년의 할배가 앞으로도 오래도록 강구안에서 쓱싹쓱싹 톱날을 ‘씰어주시길’ 염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