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후에 배를 타고 거북선의 지자포, 현자포를 쏘았다.
- 난중일기 임진년 4월 12일 일기중
일반적으로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이 처음 창제한 것으로 믿어지고 있지만 거북선이 역사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조선초기 으로, 1413년(태종 13)에 “왕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다가 귀선과 왜선으로 꾸민 배들이 해전연습을 하는 모양을 보았다.”라는 구절이 있고, 이러한 이유로 거북선은 왜구의 침입이 극심하던 고려말에 이미 제작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은 장군이 임진왜란 약 1년 전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직후 군관 나대용으로 하여금 조선초(또는 고려말)의 전래 거북선을 개량하여 새롭게 만든 것으로 ‘창제귀선’이라 구분지어 칭한다. 임진년 4월 12일은 전쟁 발발 하루 전으로, 거북선의 함포 사격훈련이 이날 성공적으로 실시되었다는 사실은 닥쳐올 전란에서 거북선의 활약을 예고하는 듯하여 의미심장하다.
이순신 종가 소장 거북선 그림
'신이 일찍부터 섬 오랑캐가 침노할 것을 염려하여 특별히 귀선을 만들었사옵니다(別制龜船). 앞에는 용머리(龍頭)를 설치하여 입으로 대포를 쏘게 하고(口放大砲), 등에는 쇠송곳을 심었으며(背植鐵첨),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엿볼 수 없게 되어, 비록 적선 수백척이 있다 하더라도 그 속으로 돌입하여 대포를 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번 싸움에 돌격장으로 하여금 이 귀선을 타고 적선 속으로 먼저 달려들어가 천자포(天字砲)•지자포(地字砲)•현자포(玄字砲)•황자포(黃字砲) 등의 각종 총통을 쏘게 한즉…'
- 이순신은 1592년(임진년) 6월 14일에 써 올린 중에서
현재 통영 강구안에 전시되고 있는 거북선은 1990년 건조되어 서울 한강에 전시되고 있던 것을 2005년 통영으로 옮겨온 것이며, 실제 전투에 이용되었던 거북선보다 규모가 다소 크다. 내부관람은 하절기 09:00~18:00, 동절기 10:00~17:00이고 무료입장이다.
거북선의 제원비교(강구안 거북선 전시장 앞 안내판)
적진을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만들며 돌격을 감행한 거북선인 만큼 적군의 집중 공격대상이 되었을 것임은 자명하다. 그러기에 귀배판엔 뾰족한 철침을 촘촘히 꽂아 적이 등선을 하더라도 선내로 침투가 불가능하였으며, 선체 옆이 아닌 아래쪽으로 향한 노는 수많은 배들과 뒤엉켜 교전을 하더라도 부러지지 않도록 설계되었다.
거북선의 사방에 설치된 포구에서는 천자포, 지자포, 현자포, 황자포가 작렬하였고, 천자포에서 쏘던 ‘대장군전’은 길이 약 1.2 m의 견고한 목제 끝에 철로 감싼 화살로 적선에 근접하여 쏘아 방패판까지 뚫으며 배를 파괴시키던 막강 무기였다.
강구안 거북선 내에 설치된 이순신 장군 동상 모형. 거북선을 지휘하던 장수는 이순신 휘하의 군관으로 앞선 당포파왜병장에 등장하는 돌격장 이언량은 당포해전에서 거북선을 이끌고 큰 전공을 세웠고, 1598년 노량해전에서 적선에 포위된 명나라 장수 진린을 구출하다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거북선 후미의 선장(돌격장)실과 사령실
방향타에 해당하는 치는 노와 마찬가지로 부러지거나 파손되면 전선 운용에 결정적 타격을 미치게 된다. 거북선 꼬리처럼 멋지게 배의 후미를 장식하는 이 부분은 거센 파도나 암초, 적선과의 교전 중 충돌 등으로부터 치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이다.
거북선은 사천해전에서 처음 실전에 투입되어 이후 주요 전투에서 선봉에 서는데 그 중 거북선이 혁혁한 공울 세운 한산해전은 세계 4대 해전에 속하므로 잠시 짚고 넘어간다.
행주대첩,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알고 있는 한산대첩은 세계 해전사에서도 획기적 전투양상을 보여준 세계 4대 해전 중의 하나다. 임진왜란이 있었던 16세기는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 등의 해양강국들이 바다를 무대로 전 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해적선의 활동까지 암암리에 국가에서 묵인해 주는 경우도 있었는데, 상대방 배와 재물탈취가 주 목적이었던 해적들은 배를 부수기 보다는 상대선에 난입하여 육박전을 펼치는 전투양상(접현전)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의 전투목적은 백성과 부하를 보호하고 침략당한 국토의 치욕을 씻어 왜적을 이 땅에서 몰아내는 것이었으므로 근접전 보다는 원거리에서 함포사격을 통해 인명피해를 최소화시켰고, 거북선과 같은 장갑선을 운용하여 적진을 뒤흔들고, 현대 함선으로도 운용이 결코 쉽지 않은 학익진을 완벽하게 구현하여 압도적 승리를 이끌었다.
한산대첩은 해전이 사람 대 사람의 싸움에서 함 대 함 전술로 전환하게 되는 시초가 되었고, 원래 육전에서 사용되던 학익진이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전술운용능력으로 해전에서 그 위력을 입증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세계 최초의 철갑선(거북선이 철갑선이었는지 아닌지 그리고 세계 최초인지 아닌지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의 등장이라는 해전사적 무게를 보여준 해전이다.
4세기가 훌쩍 지났지만 학익진은 현대 해군에서 아직 운용되고 연구, 발전을 해나가고 있다.일례로 20세기 초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해군제독 ‘도고 헤이하치로’는 러시아 발틱함대와의 교전에서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 핵심 개념인 T자형 진형과 장군의 화공전술을 그대로 사용하여 대승을 거두었고, 급기야 러일전쟁 승리의 초석을 마련하고 일본의 ‘군신’으로 추앙 받게 된다.
이순신 장군과 우리 민족의 탁월한 전함건조 및 운용능력을 통쾌하게 보여준 한산대첩을 이제 더 이상 임진왜란의 3대대첩으로만 기억할 것이 아니라 세계 해전사에 획기적 자취를 남긴 세계 최고의 해전으로 기억한다면 거북선이 더욱 자랑스럽게 여겨질 것이다.
최근 경상남도에서는 이순신 프로젝트 중 하나로 거북선 및 판옥선을 2011년까지 건조한다고 밝혔는데, 기존의 복원 거북선은 모두 2층이라 노젓는 격군과 전투에 임하는 포수, 사수들이 한 갑판에서 뒤엉켜 전투가 불가능한 구조라 역사적 고증을 받아 3층 구조의 거북선으로 설계했다 한다.(사진출처 : 연합뉴스)
이순신 장군의 창제귀선 제원에 대한 기술적 전승이 이루어지지 못해 거북선이 2층인지 3층인지 조차 정확히 알 수 없는 사실은 안타깝지만 현존 복원 거북선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것 자체는 역사를 이어가려는 노력으로 비춰져 너무도 반갑다.
거북선은 현재 남해안 각 지자체에서 관광과 연계한 사업에도 적극 활용되고 있는데, 역사적 유물을 널리 알린다는 측면에서 권장할만한 일임에 틀림없다. 조금 덧붙이자면 ‘구경거리’로서의 거북선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거북선에 담겨있는 우리 선조의 얼과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내고자 온몸을 다 바쳤던 이순신 장군의 외로운 고뇌를 알리는 일도 병행되었으면 더 좋겠다.
이순신 장군의 무과 합격교지와 선조대왕으로부터 받은 유서
문과에서 무과로 전과한 지 10년 만에 ‘무과 병과 제4인’으로 급제한 이순신 장군이 이 합격교지를 받았을 때 비로서 국가를 위해 충을 다할 때가 왔음을 느끼고 심기일전 하던 마음이 느껴지는지…전라좌수사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며 중책을 맡기는 선조대왕의 유서에서 이순신과 거북선에 대한 믿음이 느껴지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