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초원의 임팔라나 얼룩말 등과 같이 무리 지어 사는 동물들을 언뜻 보면 전부 똑같이 생긴듯 해도 하나하나 얼굴이 엄연히 다르듯, 통영의 많고 많은 섬들이 다 고만고만한 듯 보여도 바다를 생활의 터전으로 삼는 이들의 눈에는 아무리 작은 섬이라도, 동서남북 어느 방향에서 보더라도 개개의 섬은 그 고유한 '얼굴'을 다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육지와 섬을 잇는 정기여객선의 선장에게 섬의 생김새는 육지로부터의 거리를 가늠하는 등대이자 길잡이이고, 낚싯배를 오랫동안 몰아왔던 사람에게 섬의 갯바위들은 저마다 다른 종류의 고기가 잡히는 포인트이며, 섬에 사는 이들에게 섬의 얼굴은 곧 자신이 닮아 있는 스스로의 얼굴일 것이다. 섬은 그렇게 바라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여러 얼굴을 가질 수 있다.
이 섬, 저 섬 다닐 일이 많은 통영지기에게도 섬들은 각기 다른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데,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 오는 아가씨를 보았을 때 고개가 저절로 돌아갈 만큼 매력적인 가인의 모습처럼 강렬한 인상을 남긴 소매물도 등대섬을 참으로 오랜만에 찾았다. 몇 년 전 소매물도 가는 길에 겪었던 뱃멀미는 섬의 강렬한 이미지만큼이나 가혹한 것이어서 소매물도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기 때문이다. ㅜ.ㅜ;;;
해는 쨍한데 비가 오락가락하는 얄궂은 날씨였지만 멀미 염려로 객실에 앉아있질 못하고 넓지도 않은 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데크위에서 시간을 보내니 과히 그것도 나쁘진 않다.
섬에 사는 아이들인지 가족과 함께 섬으로 놀러 가는 아이들인지는 몰라도 둘이서 오랫동안 정답다.
중간 기착지인 비진도에 가까워지자 선장의 안내방송이 몇번이고 반복된다. 비진도 내리실 손님, 다 왔으니 준비하시고, 매물도 가실 손님 내리면 안된다고…
섬과 섬사이를 수백번도 더 다녔을 선장님은 아마도 비진도인지 매물도인지 그게 그거인 섬에 무턱대고 내렸다가 난감한 경우를 겪었을 사람을 여러 번 보았을 터… 그래서 ‘매물도 가실 손님은 제발 여기서 내리지 마세요.’라는 절규의 느낌이 나는 방송을 서너번이나 했을 것이고, 오늘은 주효했다. 비진도 사시는 듯한 아주머니 한분 달랑 내리고 다시 출발!
오다 말았다 하던 비는 그치고 하늘과 구름이 눈부신데, 건조한지 ‘수십년’이 되어 보일 정도의 이 배는 홀로 사는 섬할배 마른 기침처럼 엔진실의 연기를 토해낸다.
둘만의 여행을 온 게 분명한 것 같은 연인이 잠시 후 닿게 될 소매물도에서의 추억을 미리 상상하며 정다운 모습을…(아, 나는 저 나이때 뭐했지? ㅠㅠ)
젊은 연인과 비슷한 목적으로 섬에 가시기는 하겠지만 갑판 위에서 티나지 않게 섬을 바라보는 ‘더 정다운’ 중년 부부의 모습이…(이젠 나도 이 모습에 더 가까워지는구나…)
부지런히 ‘야외’에서만 돌아다닌 덕에 멀미는 잊었고, ‘가리여’가 나타나는 걸보니 이제 거의 다 왔구나. 보는 방향에 따라 하나인 것 같던 바위섬이 둘로 갈라지는 것 같다가 다시 셋으로 갈라지고 간조 때는 다섯개까지 갈라지는 이 바위섬을 이 곳 사람들은 가리여라 부른다. ‘여’란 초목이 자라지 않고 물이 나지 않는 섬을 말하는데 그래서 주로 바위섬이고, 가리여란 이름은 앞서 얘기한 것처럼 ‘갈라지는 바위섬’이란 뜻 그대로다.
섬에 닿자마자 제일 먼저 뛰어내려 사진질…. 몇 년간 여행객들과 섬에 다니며 생긴 직업병(?)의 일종일 게다.
알록달록 양철지붕의 섬집 몇채와 관광객을 맞기 위해 나름 특색있게 지은 ‘펜션’ 두어채가 전부였던 이 마을에 예쁜 집이 많이 생겼다. 그냥 둬도 예쁜 얼굴인데 더 예뻐지려 그런걸까? 얼기설기 좁은 오르막길이 불편은 했어도 멀리 외로운 섬마을에 왔다는 사실을 실감나게 해주었던 그길은 포크레인의 주도아래 포장이 준비되고 있었다.
내리자마자 약속해두었던 ‘경성호’ 선장님에게 전화. 바로 등대섬으로 넘어가려 함이다. 등대섬에 상주하는 항로표지관리소의 직원분을 만나고자했던 것은 이미지로만 기억된 등대섬에 이야기를 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2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