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세상의 길들은 몸속으로 흘러 들어온다.모든 길을 다 갈 수 없다 해도, 살아서 몸으로 바퀴를 굴려나가는 일은 복되다.
- 김훈의 『자전거여행』 중에서
그랬다. 한산도를 거쳐 추봉도 끝 해안까지 왕복 30여km의 크고 작은 길들은 이제 내 마음속에 들어와 있고, 궁둥이가 아픈 만큼 바퀴를 굴리는 일은 행복했다.
이리저리 여러 섬을 다니다 추봉도 서쪽 산허리에 가느다란 줄이 나 있음을 보고 그게 필시 오솔길일 것이라는 직감을 했다. 가보지 못한 곳에 가고자 하는 열망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식어지게 마련이라 ‘식기 전에 반드시…’ 가보리라, 그리고 자전거가 아니면 안되리라 이미 생각을 굳혔다.
한려해상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는 최소 하루 전 예약만 하면 한산도에서 자전거를 무료로 빌려준다.(위치 : 한산도 선착장 앞, 전화 : 055-) 인적사항 확인, 안전수칙 전달, 코스안내 등을 간단히 마치고 바로 출발.
이미 여러 번 자전거로 다녀 본 한산도만으로도 그리 녹록치 않은 코스에다 간만에 하는 라이딩에 대한 부담감은 그냥 넣어두고서 말이다.
목표가 추봉도이기에 한산도를 달리는 동안은 몸풀기와 더불어 자전거에 적응하는 단계다. 다행히 관리공단에서 대여하는 자전거가 ‘쓸만한’ 기종이다.(무료인데 이게 어딘가? ^^)한산도 눈에 익은 마을들을 슥슥 지나치며 바퀴만 굴리니 20여분만에 추봉교에 닿긴 했는데, 자동차의 편리함에 오래 길들여진 다리가 벌써 아우성이다. 이제 시작이다, 이놈아!!!
추봉교를 건너면 왼편이 동쪽 해안길로 비교적 평탄한 길이어서 나중을 위해 아껴두기로 하고, 오른편 봉암마을로 이어지는 길을 택했다. 바다에서 본 그 오솔길이 이쪽이니까…
다리 건너 추봉도에서 바라본 진두(律頭)마을. 한산도 동남쪽 끝 마을로 ‘디띠이’, ‘디띠이끝’, ‘디띠이치’ 등으로 불리웠는데 이는 언덕 뒤편을 일컫는 말인 ‘뒷등’의 하드 코어 사투리 발음이다. 진두(律頭)는 추봉도와 인근 도서지역을 잇는 큰 나루터였던 ’나리선머리’의 한자지명이라는 설과 임진왜란 때 우리 수군이 여기에 진을 쳤던 곳인 ‘진두(陣頭)’에서 변천된 지명이라는 설이 있다.
추봉교를 지나 오른편 처음 나타나는 마을인 봉암마을은 반질반질 까만 몽돌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해변, 봉암몽돌해수욕장으로 유명하다. 통영이 충무였던 시절, 여유께나 있는 이들이 사선을 대절하여 가족끼리 이 곳 해변에서 종일토록 놀다가 돌아가는 ‘나름’ 고급휴양지였다.
봉암마을을 빠져나와 ‘한산사’로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길은 심리적 각도로 45°는 족히 되어보이고, 잡초의 왕성한 생명력에 포장 곳곳에 갈라진 틈을 내어주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기는커녕 끌고 올라가기도 힘든 길위에서 이런 경치라도 안만났으면 사서 고생이란 말 절로 나올뻔 했다.
잡초와 시멘트 길만이 서로의 영역다툼을 하는 한적한 산길까지 마실 나온 게가 인기척에 혼비백산 도망이면서도 바짝 세운 빨간 집게발의 경계만큼은 늦추지 않는다.
‘한산사’는 우리관념속에 자리잡은 보통의 그런 절이 아니다. 그냥 섬집같기도 하고… ㅡ.ㅡ;;; 옹기종기 모인 길가 꽃들의 응원을 받으며 본격적인 오프로드에 접어든다.
사람들의 발길에 자연스레 난 오솔길일거라 애초 짐작했었는데, 다듬어 놓기까지 했다.
길에는 본래 주인이 없어,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주인이다.
- 『자전거여행』에 인용된 신경준의 『도로고(道路考)』 중에서
산넘고 물건너(진짜로 ^^) 이 길에 오기위해 그렇게도 열심히 페달을 밟지 않았던가. 산허리 가장 순한 곳들만 골라 발걸음을 이어갔을 앞사람들의 자취가 이 아름다운 길이 되었고, 그 위로 다시 자전거를 달리는 나는 이 길의 주인이 된 것처럼 행복하다.
나무와 바람은 분명 가을이라 말하는데 하늘 가득 만장한 구름은 아직 여름이 다 소모되지 않았음을 절규한다. 중력에 비례해 무겁게 실리는 다리의 힘이 고스란히 땀으로 배어 나온 내 몸은 여름인데 길 위에 태연한 자전거는 나무와 바람처럼 가을이다.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