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꾸며진 정원 같은 미래사 안뜰
주말을 온통 적신 비가 가신 후 기온이 급강하하며 성큼 다가온 가을에 미래사를 걸었다. 지난 봄에 열반에 드신 법정스님이 처음 출가한 사찰인 미래사에서 그 즈음 길상사와 관련된 세간의 이야기들을 생각하며 천천히… 꼬리를 이어가는 인연의 끈을 따라가다 백석과 란의 이야기가 다시 떠올랐고 인연이란 그렇게 돌고 도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길상사는 1960~80년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최고급요정, 대원각의 주인이었던 김영한 여사가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크게 감명받아 7천여 평의 대지와 건물 40여 동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하여 1997년 대원각 자리에 세워진 사찰이다.
18세 때의 김진향
서울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김영한은 가세가 기울자 16세의 나이에 몸 약한 신랑에게 팔려가 얼마 안되어 남편이 죽고 시어머니의 고된 시집살이 끝에 집을 나와 스스로 한성기생 ‘진향’이 된다. 가무와 궁중무에 능했고, 잡지에 수필을 발표할 정도로 시와 글, 그림도 뛰어났으며 미모 또한 뛰어났다고 한다.
스물 세살 때 흥사단과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했던 스승 신윤국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을 떠난 후 스승의 투옥소식을 듣고 함흥감옥을 찾아갔지만 거절당하자 다시 함흥 기생이 된다. 그 곳 유지들의 도움으로 혹 스승을 볼 수 있을 거란 희망으로…
이 때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있던 시인 백석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되고,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이별은 없을 것’이란 백석의 다짐이 무색하게 백석의 집안에선 다른 여자와 강제로 결혼을 시켰고, 백석은 첫날 밤도 치르지 않은 채 ‘진향’을 찾아가 만주로 달아나자고 했지만 백석의 앞길을 걱정했던 ‘진향’은 이를 거절한다.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이었다.
서울로 돌아온 김영한은 이후 대원각을 열어 엄청난 재산을 모았지만 늘어나는 재산에 비례해 더욱 커지는 백석에 대한 간절함으로 백석을 잊지 못했고, 평생토록 그의 생일인 7월 1일이면 하룻동안 일체의 음식을 입에 대지 않고 지냈다.
김영한은 ‘진향’이라는 이름 외에 ‘자야’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백석에게 선물한 ‘당시선집’에 실린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를 본 백석이 붙여준 아호이다. 자야오가는 장안에서 서역으로 오랑캐를 소탕하기 위해 떠난 낭군을 애타게 기다리는 여인 자야의 애절한 심정을 노래한 곡이다.
백석은 마치 ‘자야오가’를 읊듯 이루어지지 않는 자신의 사랑에 대한 심경을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란 시로 노래하고 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 석 -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눈은 푹푹 날리고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나타샤와 나는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평북 정주생인 백석은 김소월과 함께 1930년대 평안도의 양대 서정시인으로 평가 받는 천재 시인이다. 한 곳에 붙박혀 살지 못하고 세상을 방랑하던 그의 삶의 단편이 백석, 낙백한 청춘의 초상 / 박주택 시인의 글에 소개되어 있다.
백석은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연애를 겪는다. 두 번의 결혼은 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그의 부모가 정해준 것이고 두 번의 연애는 '난蘭'이라는 여자와 '자야子夜'라는 여자와 관련이 있다.
'난'이라는 여자는 알려진 바에 의하면 1935년 6월 백석의 절친했던 친구인 허준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만난 통영 출신의 이화고 학생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녀는 백석의 친구와 결혼하여 버린다.
'자야'는 조선 권번의 기생으로 1936년 백석이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부임한 뒤 그 해 가을 교사들의 회식 자리에서 그녀를 처음 만나 이후 3~4년 동안 애정 관계를 지속하다 1939년 백석이 만주의 신경으로 떠나게 된 후 이별한다.
- 중략 -
백석이 마음 깊숙이 품었던 '난'은 통영 명정明井사람으로 백석과 사랑을 나누지 못했지만 백석은 그녀를 끝내 잊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야'와 열애하는 중에도 '난'이 사는 마을을 찾아간다거나 그녀의 고향인 통영을 동일 제목으로 하는 시를 무려 3편이나 쓴 것도 이를 반증한다. 1936년 1월23일 >에 발표된 [통영]에는 이에 대한 감정이 잘 드러나 있어 주목을 끈다.
통영 (統營)
- 백 석 -
구마산(舊馬山)의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갓 나는 고당은 가깝기도 하다
바람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황화장삼 영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처녀들은 모두 어장주(漁場主) 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한다는곳
산 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금(錦)이라는 이같고 내가 들은 마산(馬山) 객주(客主)집의 어린 딸은 난(蘭)이라는 이 같고
난(蘭)이라는 이는 명정(明井)골에 산다는데명정(明井)골은 산을 넘어 동백(冬栢)나무 푸르른 감로(甘露)같은 물이 솟는 명정(明井) 샘이 있는 마을인데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쳐며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긴 토시 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여인은평안도(平安道)서 오신 듯한데 동백(冬栢)꽃 피는 철이 그 언제요
옛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어서 나는 이 저녁울 듯 울 듯 한산도(閑山島)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백석이 사랑한 여인 난(蘭)
비슷한 시기에 두 여인을 사랑했지만 둘 다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못했던 사랑은 순탄하지 않았던 그의 삶의 단면을 보는 듯하다. 이런 백석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선이 있었으니 효봉스님(미래사는 1954년 효봉스님이 창건한 사찰이다.)의 상좌로 10여 년 간 수선(修禪)한 고은 시인(법명은 일초一超)이다.
백 석
- 고 은 -
아름다운 시인이었다. 누구에게도 말없이 새김질하는 시였다
머리에 손깍지 베게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소처럼 연하게 새김질하는 것이었다아내도 집도 다 없어지고압록강 끄트머리신의주 목수네 집 문간방에 들어싸락눈 문창을 때리는 추운날
다 가라 앉아버린 마음속 앙금먼산 뒷섶 바위섬에 따로서서어두워 오는데하이야니 눈 맞고 서 있는갈매나무 한 그루를 생각하고 있었다
태어나서 자란 평안북도말더듬이 인듯그 고장말 아니면다른 말은 몰라여학교 영어 교사를 아무리해도다른말은 몰라어쩌다 사랑하는 여자를 나타샤라고 불러보고는
도대체 시인이란 유난히 우렁차거나유난히 애절하거나그것말고이리도 이른 봄날의 가난으로 남는 잿빛인가,이리도어스름인가누구인듯아니 달밤의 박꽃인듯차츰차츰 밝아오는 어둠 아닌가한국시의 가슴속 진짜
몇십년 동안 없다가 열이래 열여드래 하현달로 떴다먹고싶게울며먹고싶게
개개의 사건처럼 보이는 이야기들이 미처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수한 인연의 실타래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고 모골이 차가워져 온 몸을 옹송그린다. 언제 가도 편안한 통영의 조그만 사찰 미래사, 그러나 미래사를 탯줄로 두고 잉태된 수많은 생각과 사연들은 분명 눈에 보이진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것에 대한 외경심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나비야, 너는 또 어느 후생에 어떤 모습으로 나와 다시 마주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