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혼이 깃든 문학비를 찾아서
통영인들에게 남망산은 하나의 신적인 존재이며 어머니처럼 그리운 산이다. 남망산은 통영항과 동호만을 가르며 길게 바다로 내민 해발 약 72m의 조그마한 산이다. 예로부터 송림이 울창하여 마치 강구에 떠 있는 섬처럼 산그늘을 드리우며 주변경관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산언덕에서 바라다 뵈는 해안 풍광 또한 절경이다.
청마 유치환, 초정 김상옥, 대여 김춘수 등 국보급 시인들이 뻔질나게 오르내리며 작품을 구상했던 곳이다. 풍경화를 잘 그리지 않던 이중섭이 통영으로 피난 와 아름다운 남망산을 소재로 풍경화를 그렸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통영의 문학비를 소개하면서 남망산을 침이 마르도록 치켜세우는 것은 통영문학을 낳은 모태와도 같은 특별한 곳이기도 하거니와 이곳에 국보급 시인의 시비가 있기 때문이다.
잘 아시다시피 통영은 눈길 주는데 마다 임란 유적지 아닌 곳이 없으며 발 길 닿는 곳이 모두 작품의 무대다. 이곳저곳 가는 곳 마다 작가들의 입김이 뿜어져 나오는 동상과 시비를 비롯하여 벽화, 아트타일 등이 문화예술의 도시임을 증명하고 있다. 낭만산공원, 시내, 그 외 지역 등으로 나누어 문학비를 소개하고자 한다.
<콘텐츠 제공 : 수필가 김순철>
김춘수의 ‘꽃’시비
개요
김춘수의 ‘꽃’시비
통영문화의 상징이자 통영문화의 1번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남망산 공원.
그 남망산으로 오르는 입구 삼거리 쌈지 터에 국민으로부터 ‘꽃의 시인’이라고 사랑 받는 김춘수 시인의 ‘꽃’이 새롭게 단장돼 시비로 서있다.
이 시비는 당초 항남동 간선도로변에 있었으나 이곳으로 옮겨 자리를 잡았다.
이곳은 시인의 유년시절의 놀이터였을 것이다.
자다가 눈을 뜨고 깨어나 대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서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던 것이 이곳의 바다 물빛이었을 것이고
또한 물빛 고운 바다 위를 나르는 갈매기의 나래짓과 정박한 배들이었을 것이다.
바다의 물빛과 파도소리를 한꺼번에 가까이에서 들을 수 있고 바라볼 수 있는 이곳은 시인의 생가와는 엎어지면 코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다.
시인이 생전에 끔찍이도 사랑하고 그리워했던 고향바다는 어떤 바다였을까.
김춘수 시인의 고향 사랑은 어쩌면 바다사랑일 것이다.
글로써 바다를 ...
소개
통영문화의 상징이자 통영문화의 1번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남망산 공원.
그 남망산으로 오르는 입구 삼거리 쌈지 터에 국민으로부터 ‘꽃의 시인’이라고 사랑 받는 김춘수 시인의 ‘꽃’이 새롭게 단장돼 시비로 서있다.
이 시비는 당초 항남동 간선도로변에 있었으나 이곳으로 옮겨 자리를 잡았다.
이곳은 시인의 유년시절의 놀이터였을 것이다.
자다가 눈을 뜨고 깨어나 대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서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던 것이 이곳의 바다 물빛이었을 것이고
또한 물빛 고운 바다 위를 나르는 갈매기의 나래짓과 정박한 배들이었을 것이다.
바다의 물빛과 파도소리를 한꺼번에 가까이에서 들을 수 있고 바라볼 수 있는 이곳은 시인의 생가와는 엎어지면 코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다.
시인이 생전에 끔찍이도 사랑하고 그리워했던 고향바다는 어떤 바다였을까.
김춘수 시인의 고향 사랑은 어쩌면 바다사랑일 것이다.
글로써 바다를 그린 그의 산문은 시 못지않게 절창이다.
문학가를 많이 배출한 통영에서 바다예찬을 이렇게 그림을 그려 손에 잡아주듯 묘사를 잘해 낸 이를 여태껏 보지를 못했다.
그만이 간직한 섬세하고 부드럽고 탁월한 미적 감각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이 사랑했던 초록이고 남빛인 고향바다는 그와 절친했던 전혁림 화백에게로 이어지면 바로 코발트블루의 바다가 된다.
시인의 눈에는 초록이고 남빛이었던 바다가 화가의 눈에는 코발트블루의 바다다.
두 거장의 눈에 비친 고향바다는 결국 같은 바다였으리라.
김춘수 시인이 작고하고 난 뒤 그를 기리며 쓴 전혁림의 글이 있다.
이제 전혁림마저 가고 없으니 그 글은 통영문화예술의 역사가 되었다.
■ ‘꽃’시비 건립
시 전문 계간지 「시인세계」에서 기획특집으로 국내 현역시인 246명을 대상으로 누구의 시를 가장 좋아하는지
「시인들이 좋아하는 애송시」를 조사한 결과 김춘수의 ‘꽃’으로 밝혀졌다.
시인들 스스로가 애송한다는 김춘수의 ‘꽃’을 일반인들이라고 아니 좋아 할 리 없다.
시낭송대회에서나 「문학의 밤」같은 행사장에는 의례히 단골메뉴로 등장한다.
심지어 통영의 애주가들이 즐겨 찾는 어느 다찌집( 해산물이 풍부한 술안주를 비교적 저렴하게 마실 수 있는 술집) 같은 곳에는
주인이 간혹 단골손님을 상대로 술집 벽에 걸린 김춘수의 시, ‘꽃’에서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를 슬쩍 바꾸어 놓고
틀린 곳을 바로잡으면 술값을 공짜로 주는 그런 곳도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하나의 꽃이 되었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것 처럼 /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 그에게로 가서 나도 / 그의 꽃이 되고싶다. //
우리들은 모두 / 무엇이 되고싶다 /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의「꽃」전문
■ 시비건립 「꽃 한 송이」모금운동
‘꽃’시비는 ‘꽃과 향기’라는 시민단체가 주동이 되고 지역신문 한산신문이 후원하여 김춘수시비 건립을 제안했다.
통영시의 예산으로 시비를 건립하는 것은 큰 의의가 없으므로 시민들을 대상으로 「꽃 한 송이」 모금운동을 벌이도록 한 것이다.
김춘수 ‘꽃’시비 건립을 위한 「꽃 한 송이」한 구좌 1만원 모금』이라는 제호의 한산신문 광고가 연일 나가자
김춘수를 사랑하고 김춘수의 ‘꽃’을 좋아하는 시민들과 출향인사들이 모금에 앞 다투어 동참했다.
한 구좌를 내는 사람도, 열 구좌를 내는 사람도 있었고 초등학생에서 여고생, 시장통의 아주머니에서 바다고기를 잡는 어부에 이르기까지
김춘수의 ‘꽃’은 다양한 계층과 연령층에서 뜨겁게 호응했다.
시비 전면에는 김춘수가 직접 쓴 ‘꽃’의 글씨가 새겨져 있고 시비 뒷면에는 시비건립모금에 협조한 사람들의 이름을 동판에 낱낱이 새겨 부착해 놓았다.
오다가다 시비를 쓰다듬어 보기도 하고 주변의 쓰레기도 주워가는 사람은 아마도 시비건립에 모금한 사람들일 것이다
■ 「꽃」의 시작(詩作) 배경
그러면 시 「꽃」이 어떤 시상(詩想)을 연유로 하여 세상에 태어났을까.
「꽃」의 시작(詩作) 배경에 대해 김춘수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아주 어릴 때의 일입니다. 내 나이 너댓 살쯤 되었을까 어쩜 그보다도 더 어렸을는지도 모릅니다.
강보에 싸여 기저귀를 차고 있었을 그런 젖먹이 시절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생각하니 거기는 우리 고향에 있는 세칭 장개섬이라고 하는 작은 섬이었습니다.
원래는 섬이었는데 내가 이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사람들은 그 섬에 기다란 목을 만들어 육지에다 갖다 붙여 놓았습니다.
왜 그랬냐 하면 그 작은 섬에서 금이 난다고 어느 실없는 사람이 섬의 한 복판을 세로로 깊이 파 들어갔습니다. 바다에 닿도록 말입니다.
그러는 동안 인부들이 매일 매일 배를 타고 왔다갔다 하기가 번거로우니까 발판 삼아 육지와 섬을 잇는 긴 목을 섬을 파낸 흙으로 메워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내가 그 섬에 처음 갔을 때는 이미 그런 모양으로 사람들이 걸어서 왕래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 때가 아마 여름이라고 생각됩니다. 아이들이 멱을 감고 있었고 어른들도 한 둘 머리에 수건을 동여매고 헤엄을 치고 있었으니까요.
그때 나는 나서 처음으로 어떤 감동적인 장면에 맞부닥쳤습니다.
어디선가 수십 마리나 돼 보이는 새들이 기다란 날개를 폈다가 오므렸다가 꼭 고양이 울음소리 같은 소리를 쉬임없이 내면서 날고 있었습니다.
한때는 하늘과 바다가 온통 그 새들로 뒤덮여버리기도 했습니다. 내 눈앞은 그들의 비상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것은 이상하기만 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다음 나는 유치원에 다니게 되었고 호주 선교사가 경영한 그 유치원에서 서양 아이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그림책을 보았습니다.
그 그림에서 나는 그때의 그 새를 보았습니다.
내 눈에 그렇게도 크게 보이던 그때의 그 새들 중 몇 개를 가리키면서 금발벽안(金髮碧眼)의 원장선생님은 비행기라고 했습니다.
이리하여 나는 갈매기를 비행기로 착각하게 됐습니다.(중략)
나는 중학생이 되어 서울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종로 화신백화점 앞이든가 광화문통 어디든가 그런 곳을 걷다가 문득
나는 대낮에 하늘에서 갈매기가 우는,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닌 수십 마리의 갈매기가 우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때 내 눈에 떠오른 하늘과 바다는 고향의 장개섬의 그것이었습니다.
몇 겹으로 두텁게 두텁게 싸인 흰 구름 뭉치와 한려수도로 멀리 뻗어나간 쪽빛 바다였습니다.
그것들이 자꾸 할머님과 어머님의 치마폭이며 옷고름 사이에서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그 때의 그 하늘과 바다는 어느 책에서도 누구의 말씀에서도 설명되고 있지 않은,
나만이 알고 있는 그 오묘함을 지금 여기서 도저히 적어 보일 수가 없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나는 나중에 일본 동경에서 또 한 번 이런 경험을 한 일이 있습니다.(중략)
어느 날, 50 몇 년 전의 어느 여름 저녁입니다. 아직도 젊으신 어머님이 장독간에 볼 일이 있어 가십니다.
아마 간장이나 된장을 뜨러 가시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님의 치마 끝을 잡고 어린 아들인 내가 아장아장 따라 갑니다.
어머님이 어떤 동작을 하다가 무심코 고개를 드시고 서쪽 하늘을 바라봅니다.
나도 무심코 어머님의 시선을 따라 서쪽 하늘을 멀리멀리 바라봅니다. 그쪽은 온통 놀로 물들어 있습니다.
놀로 물든 하늘이 어머님의 볼을 적십니다. 어머님의 볼도 놀빛으로 물들어 갑니다.
나는 또 그런 어머님의 볼을 하염없이 들여다봅니다. 어머님이 좀 다르게 보입니다. 하얀 모시적삼이 더욱 하얗게 보입니다.
어머님은 간장 종지를 든 채로 그림 속으로나 이야기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그때의 그 하늘을 나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마 그때 담장가에는 봉선화가 두어 송이 꽃잎을 펴보이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그 뒤로 홍난파의 〈봉선화〉를 들을 때마다 특히 金天愛 여사가 〈봉선화〉를 부르는 것을 들었을 때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득 괴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나에게로 왔습니다.
나의 시에 「꽃」아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시는 아마 이러한 경험들과 어떤 관계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원래가 우리는 고독한 시간을 살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를 내쪽으로 불러 들이고 있는 것이나 아닐는지요.
그것이 어머님이든 하나님이든 또는 민족이든 한 송이의 꽃이든 간에”
김춘수 수상집, 「시인이 되어 나귀를 타고」에서
출처 : 본 콘텐츠의 저작권자 - 수필가 김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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